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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학자공생재단

소나무의 혼잣말

~윤학자, 국경을 넘은 사랑~

 

 

안녕? 난 소나무야.

이 한반도의 남쪽 끝 전라남도 목포시 유달산 자락에서 오래전부터 자라고 있었지. ? 얼마나 오래 살았냐고? 후후후글쎄? 벌레나 새나 동물들은 세월이 흘러도 별로 달라지는 게 없으니까, 얼마나 됐을까

 

그건 그렇고, 그동안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주 희한한 젊은이가 찾아왔었지. 몸집은 그다지 크지 않고 마른 편인데, 동그란 안경 속에서 눈빛이 유난히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어. 그 젊은이 이름은 윤치호였는데 오가는 사람들은 그를 '거지대장'이라고 부르더라고.

 

, 거지대장?

그땐 일제시대였으니까 거지들이 널려 있었을 텐데 무슨 거지대장이냐고? 이유는 금방 알게 됐어. 얼마 되지 않아 그가 초라한 차림의 아이들을 많이 데리고 나타났는데, 다리 밑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아이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돌봐 주고 있었대. 자기 혼자 먹고살기도 힘들 판인데 참으로 기특한 젊은이잖니?

 

그러던 어느 날 치호가 내 곁으로 다가오더니 눈 앞에 펼쳐진 풀밭을 가리키면서 큰소리로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거야.

이곳에 우리가 함께 살 집을 지을 거야. 땅이 꽤 넓으니까 밭도 만들 수 있겠어. 힘들겠지만 우리가 힘을 합치면 할 수 있을 거야. 이래 봬도 왕년에 난 목수였단다.”

 

, 사실 그 말을 듣는 순간 깜짝 놀랐어. 여기에 고아원을 짓는다고? 농담 아냐? 이런 돌투성이 산자락에 집을 짓고 밭을 만들겠다고? ~ 내가 오랫동안 이곳에 살았지만 저런 사람은 처음이야. , 그저 조용히 살고 싶은데 말야.

 

그 뒤로 어떡하나 하고 심심풀이로 구경하고 있었는데 일솜씨가 보통이 아니더라고. 큰아이들과 함께 돌을 고르고 땅을 다지고 어디선가 나무를 구해오더니 진짜로 집을 짓기 시작하는 거야. 목수라고 하더니 솜씨 하나는 일품이더라니까. , 절대로 안 될 거로 생각했는데 점점 집 같은 건물이 생겨난 거야. 아니, 저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저런 힘이 솟아날까? 나도 솔직히 감탄했다고.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해본들 혼자서 하기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지. 일을 하면서도 아이들을 계속 돌봐줘야 하잖아? 누군가 도와줄 사람이 있어야지. 하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곳인 데다가 거지 같은 아이들만 잔뜩 모여 있는데 누가 선뜻 오겠냔 말야? 사실은 나도 가지를 설레설레 저었다고.

 

그러던 어느 날 언덕 아래서 낯선 기모노 차림의 젊은 여성이 올라 오더라고.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일본인이었어.

내 곁으로 다가오더니 두 사람이 얘기를 하더라고. 나도 나무지만 호기심이라는 게 있거든. 모르는 척하면서 귀를 쫑긋 세우고 두 사람 얘길 다 듣고 있었지.

 

다카오 선생님 소개로 왔습니다. 다우치 치즈코라고 합니다.”

 

여성이 인사를 하니까 치호가 수줍은 듯 배시시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어.

 

다우치 씨, 공생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공생원은 함께 사는 동산이라는 뜻이랍니다. 다우치 씨에 대해서는 교회서 다카오 선생님한테 들었습니다. 여학교 시절부터 다카오 선생님 사모님한테서 오르간을 배우셨다고요. 아이들에게 음악도 가르치고 일본어도 가르쳐 줄 선생님을 찾고 있었답니다. 어린아이들을 돌봐 주신다면 더욱 고맙고요.”

 

계속 말을 이어가며 치호는 치즈코를 고아원 건물로 안내했어. 고아원이라고 하지만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판잣집이었지. 미닫이도 문지방도 없었어. 가마니를 깔아놓은 삭막한 15평 남짓 방이 하나 있을 뿐이었으니까. 맙소사, 저렇게 귀한 집안의 참한 규수한테 여기서 고아들을 돌봐 달란 말이야? 같은 조선 사람도 모른 척하는 아이들을 과연 일본 사람이 돌봐 줄까? 잠시 후 치즈코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언덕을 내려갔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게 뻔하잖아?

 

그런데 말야, 다음날 치즈코가 커다란 보따리를 싸 들고 다시 찾아왔단다. 보따리 안에는 치약이랑 비누, 수건, 음식들이 잔뜩 들어 있었어. 그 당시 고아들은 맨발로 원내를 마구 드나들고 아침에 세수할 줄도 모를 정도로 생활습관이 전혀 몸에 배 있지 않았거든.

 

치즈코는 아이들에게 세수하는 거며 손 씻는 거며 하나하나 상냥하게 가르쳐 주었단다. 부스스한 머리를 빗으니 야생마 같던 아이들도 금세 깔끔해졌지. 치즈코가 오르간을 연주하면 아이들은 노래를 따라 부르고 말과 글도 익혔어. 치즈코가 오고 나서부터 아이들 표정은 몰라보게 밝아졌고 남에게 뺏기지 않으려고 눈을 부라리던 아이들이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밥을 먹게 되었단다.

 

어느덧 치즈코는 공생원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고 마침내 두 사람은 1938년 결혼을 하게 되었단다. 아이들은 두 사람을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며 따랐는데 말하자면 결혼하자마자 수십 명의 아이들이 생겨난 격이랄까.

 

그 후로도 공생원 아이들은 점점 늘어나갔어.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을 때니까 먹고 살기 힘든 부모한테서 버림받은 아이들이 많이 찾아왔지. 원생 중에는 치즈코가 낳은 아이들도 있었어.

 

그런데 놀라운 건 치즈코는 자기 아이들도 고아들과 똑같이 키웠단 사실이야. 자기 자식을 특별히 사랑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모든 아이들을 평등하게 사랑했단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 ~ 정말 대단한 부부야!

 

마침내 1945815일 길었던 전쟁이 끝나고 일제 치하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만세를 불렀지. 일본이 전쟁에서 졌으니 입장이 뒤바뀌고 그동안 고통받던 사람들은 일본한테 앙갚음한다며 보복하는 사건들이 연달아 터졌어. 치즈코가 일본인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니 급기야 목포 공생원에도 폭도들이 들이닥친 거야.

 

왜놈, 때려 죽여라!”

친일파놈, 나와라!”

폭도들이 흉기를 휘두르며 거칠게 외쳐대니 치호가 나서서 수습하려고 했지만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어. 끝내 폭도들이 현관문을 깨고 원내로 우르르 몰려드니 치즈코는 기겁할 수밖에. 그런데 다음 순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벌어졌단다.

 

원생 아이들이 마치 인간 사슬처럼 손에 손을 잡고 치즈코를 빙 둘러싸며 폭도들을 가로막았던 거야.

우리 어머니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어머니는 나쁜 사람 아냐!”

일본인이지만 우리 어머니야!”

어머니한테 손대지 마! 그냥 돌아가!”

 

아이들은 폭도들이 무섭게 호통을 쳐도 기죽지 않고 떨리는 손을 꼭 움켜쥐고 필사적으로 어머니를 지켰단다. 치즈코는 아이들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어.

얘들아고맙다, 고마워!”

어머니-!”

어머니-!”

아이들도 울음을 터뜨리며 치즈코를 끌어안았어. 주변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마냥 지켜보고만 있었단다. 그러다 폭도들도 어느새 사라져 버렸지.

 

치즈코는 그날 일을 평생 잊지 못했어.

일본인 다우치 치즈코는 그날 죽었어요. 이 목숨을 아이들한테서 얻었으니 앞으로 아이들을 위해 살 겁니다.”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그렇게 말하곤 했으니까.

 

그녀는 자기 이름을 윤학자로 바꾸고 기모노가 아닌 한복을 입었단다. 마을 사람들도 점차 그녀에게 마음의 문을 열게 되고 공생원에 기념비를 세워 주기도 했단다.

 

그러던 중 돌연 한국전쟁이 발발해 북한군이 남하해왔어. 북한군은 일본인이나 일본에 동조한 사람들을 증오한 나머지 가는 곳마다 인민재판을 열었는데, 결국엔 그녀도 총구 앞에 서게 됐지 뭐야.

 

그녀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치호에게 이렇게 다짐했어.

이 나라에서 일본이 저지른 일들을 생각하면 여기서 도망쳐선 안 돼요. 죽든 살든 모든 걸 하나님께 맡기렵니다.”

 

그런 그녀를 치호는 필사적으로 변호했어. 지금껏 그녀가 고아들을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아느냐며. 그래도 처형하겠다면 나부터 먼저 처형하라고 호소했어.

 

윤학자 처형에 찬성하는 사람, 박수 쳐!”

공산당원들이 서슬이 시퍼렇게 다그치자 그땐 치호도 학자도 눈을 감고 죽음을 각오했지. 그런데 웬걸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던 거야. 두 사람한테서 깊은 감동을 받았던 마을 사람들이 총구 앞에선 벌벌 떨면서도 처형에는 절대로 찬성하지 않았던 거야. 그러니 공산당도 어쩔 수 없이 처형을 포기할 수밖에.

 

이렇게 정으로 끈끈하게 맺어진 두 사람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어느 날 갑자기 치호가 사라져 버렸어. 광주로 식량을 구하러 나간 뒤로 영영 소식이 끊겨 버린 거야. 공산당에 납치됐다는 소문도 있어 사방팔방으로 수소문해 봤지만 결국은 찾지 못했어.

 

마을 사람들은 홀로 남은 학자를 걱정하며 자식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가라고 설득하기 시작했어. 그런데 그녀는

남편이 20년 생애를 바쳐온 목포 공생원은 제 목숨과도 같아요. 남편이 돌아오는 그 날까지 제 목숨을 다해 지킬 겁니다.”라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고.

 

이후로도 그녀는 아이들과 더불어 정말 열심히 살았어. 밭일도 하고 구두닦이도 하고 봉투 만들기도 하고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다 했지. 그녀는 리어카를 끌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김치나 남은 음식들을 얻어 오기도 했어.

 

마침내 그런 노력들이 점차 세상에 알려지자 공생원에 지원의 손길이 뻗쳐오기도 하고 그녀는 한국 정부로부터 일본인 최초로 훈장도 받게 되었단다.

 

그런데 모진 고생으로 혹사당한 그녀의 몸은 눈에 띄게 야위어갔고 끝내 병을 얻어 쓰러지고 말았어. 그런데 그녀는 입원하라는 주변 사람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주문처럼 이렇게 말했단다.

날 위해 비싼 치료비를 쓰면 안 돼요. 그 돈으로 아이들 진학 자금에 보태 쓰세요.”라고.

 

그로부터 얼마 뒤 일인데, 그녀의 아들 윤기가 내게로 다가오더니 발밑에 앉아서 제법 커진 공생원을 바라보면서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그렇게 먹고 싶어 하셨던 우메보시를 드리고 싶었는데라고 하면서 펑펑 울더라고.

 

아아그녀가 영영 가버렸구나!

그땐 내 마음 한구석에 큰 구멍이라도 뚫린 것 같았어. 아마 쉰여섯쯤이었을 걸? 아직 젊은 나이에 치호가 행방불명이 된 후로도 줄곧 공생원을 지켜주었는데 말야. 일본인이면서 장하게도 3천여 명이나 되는 한국 고아들을 키워냈어. , 여기서 그 모습을 줄곧 지켜보았단다.

 

그녀의 민족을 초월한 인류애 정신은 한국 고아의 어머니로 추앙받게 되었고 목포시 최초 시민장에 한국 전역에서 3만 명이나 참석했단다. 그날 신문들은 목포가 울었다라고 보도했지.

 

비록 치호와 학자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 뜻은 아들 윤기한테로 이어졌단다. 세계의 고아들이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UN 세계 고아의 날제정을 유엔에 호소하고 일본 각지에 재일동포 복지시설을 짓기도 하며 정말 열심히 살아왔단다.

 

사람이란 게 너무 신기하지 않아? 육신의 목숨을 다해도 그 사랑은 끝이 없으니까 말이야. 그녀가 남긴 민족을 초월한 인류애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넓어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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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자 인터뷰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저희 일본인회 Lilac(라일락)은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화합의 정신으로 민족을 하나로 연결하는 친선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도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이 힘을 모아 함께 썼습니다.

 

 

수상소감 한마디를 부탁드립니다.

아주 기쁩니다! 글을 쓰는 동안 감동을 받아 몇번이고 눈물을 흘렸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평소 고아나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이 있으셨나요?

, 저희들은 UN세계고아의날 제정을 응원하고 있답니다. 이순재 총재님 취임식에도 참석한 적도 있어요.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동참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렵니다.

   

 

전부터 윤학자 여사에 관해 알고 계셨나요? 혹은 윤학자 여사에 대한 본인의 생각이나 느낌은 어떤가요?

, 알고 있었습니다. 책도 보고 영화도 보고, 윤기 회장님으로부터 직접 말씀도 들었습니다. 한국으로 시집온 저희들에게 윤학자 여사님은 위대한 대선배입니다. 윤 여사님의 국경을 초월한 인류애 정신을 이어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