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장기화함에 따라 고아와 피난민들은 급격히 불어나 숙사가 부족했다.
숙사 마련이 시급해졌다.
공생원에서 해안을 따라 3k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서산동이 있다.
옛날엔 꽤 번화한 거리로 일본인의 유곽이 있었는데, 그곳을 목포시가 공생원에 매각했다.
대반동 소재의 공생원을 제1숙사로 칭하고 새로 매각한 서산동 숙사는 제2, 제3숙사라고 이름 지었다.
사 목사는 아버지가 돌아올 때까지란 단서로 대리 원장에 취임하여 초반기엔 무척 열성을 보였다.
사 목사는 아버지의 오랜 친구로, 어머니가 당시 가장 신뢰하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원아들이 학교 근처 서산동의 제2, 3숙사로 옮기게 되자 그는 제1숙사인 공생원에 발길을 줄이기 시작했다.
부산(당시 임시 수도)에서 열리는 원장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출장을 갔던 사 목사는 돌아오고 나서도 공생원에 나타나지 않았고 어머니에게 아무런 보고도 하지 않았다.
“부산에서 너무 무리하셨는지 감기 기운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삼일 뒤에는 들르시겠죠.”
범치 형이 말했다.
“그러면 연락이라도 해 주지. 부산에서 돌아온 지 벌써 한 달이나 됐는데 매일 식량과 일용품을 운반해 오는 사람 편에 한마디 소식이라도 보내주면 좋으련만….”
사 목사가 원장으로 취임한 후부터 모든 보조금과 원조는 시내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서산동 제2숙사에 보관하게 되었고 어머니가 있는 제1숙사에는 필요한 물량만 배달되었다.
사실 감기몸살은 사 목사의 한낱 핑계였다.
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사 목사의 저의를 간파하고 있었으나 이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어머니는 변함없이 사 목사를 신뢰하고 있었다.
마침내 견디다 못한 어머니는 범치를 불러 사 목사를 방문하기로 했다.
범치 형은 어머니의 경직된 표정을 읽었다.
솔직히 현실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 요즈음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어요. 제가 확인한 건 아니지만 아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공생원이 없어지고 유달원(儒達園)으로 바뀐다고 해요. 아이들 얘기니까 전적으로 믿을 수 없지만, 유달원 운운하는 걸 보면 심상치 않은 것 같아요.”
“유달원?”
유달원이란 이름을 되뇌는 어머니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범치 형은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아이들 말로는 공생원은 함께 산다는 뜻이라서 어쩐지 공산당 같은 느낌이 든다는 거예요. 목포에는 유명한 유달산이 있으니까 구태여 공산당 냄새가 나는 이름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나요? 그래서 유달원으로 바꾼대요. 물론 사 목사님의 의견이셨나 봐요.”
어머니는 전신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6·25 동란으로 남편이 공산당으로 몰려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이제 또 공생원의 이름으로 수난을 겪어야 한다니.
눈앞이 캄캄해지고 두 다리가 후들거려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 말이 어디 있는가? 진실을 확인해야만 한다. 사 목사는 주님의 종이다. 목사가 그런 일을 할 리 없다. 모두 헛소문일 것이다.’
어머니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하여튼 사 목사를 만나야 했다.
어머니와 범치 형은 제2숙사로 갔다.
사 목사의 태도는 너무나 냉정했다.
“당신은 친구의 부인입니다. 동시에 일본인이지요. 일본 사람 손에 한국 고아를 맡겨도 좋을지 고민했습니다. 그럴 순 없다는 결론을 내렸지요. 제 기분도 좀 이해해 주십시오.”
사 목사는 어머니의 가장 아픈 곳을 지적하며 모든 것을 단념하라는 것이었다.
‘역시 아이들의 이야기가 맞았구나.’
애써 부인하려 했던 불길한 예감이 적중한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얼마나 상심이 클까를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에 가슴이 저렸다.
어머니는 용기를 내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남편이 행방불명된 이래 오늘까지 큰 힘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사님 덕분에 CCF 원조도 받을 수 있게 되고 아이들 생활도 안정이 됐습니다. 언제까지나 대리 원장으로 계실 순 없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고아들을 위해 매각된 숙사는 어디까지나 저 아이들 것입니다. 누구 소유가 되건 아이들이 살 수 있다면 저로선 이의가 없습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나니 참았던 눈물이 솟구쳤다.
“하지만…”
하고 어머니는 말을 이었다.
“목사님도 아시다시피 공생원은 남편이 생명을 걸고 키워왔습니다. 남편이 돌아왔을 때 그 공생원이 없어진 걸 알면 얼마나 낙담하겠습니까? 공생원의 이름만은 고수하고 싶습니다.”
조용하고 말수 적은 어머니가 담담히 이야기했다.
거지 대장이라 불리던 남편이 다리 밑에서 데려다 키운 아이들의 거취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다리 밑에서 주워다 기른 아이들만이라도 저에게 돌려주세요. 저 아이들과는 헤어질 수 없습니다. 저 아이들은 저를 도와준 은인입니다. 구두닦이, 껌팔이를 하면서 어린 동생들을 지켰던 제 친자식이나 다름없는 아이들입니다. 제발 아이들을 돌려주세요.”
사 목사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그리고는 차갑게 쏘아붙이듯 이야기했다.
“공생원의 간판은 이제 없습니다. 공산군이 남하하여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고 죽었습니다. 공생원이란 이름은 다분히 용공(容共) 사상이 짙어 취소당한 겁니다. 두 번 다시 인가받지 못할 겁니다. 유달산의 정기를 받으며 자라는 아이들이란 뜻에서 유달원이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 생각지 않습니까? 장남 기(基) 군이 장성할 때까지 생활비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부인은 이제까지 하셨던 대로 우리 유달원의 제1숙사 유아실에서 봉사해 주십시오.”
사 목사는 독단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거의 명령조의 주문이었다.
어머니는 순순히 물러설 수가 없었다.
“목사님! 그럼 저더러 공생원에서 손을 떼라는 말씀입니까?”
“제 뜻이 아닙니다. 지난번 이사회에서 결정된 사항입니다. 순전히 이사들의 의견이지요.”
사 목사는 이사회를 핑계 삼았다.
심신이 지쳐 있던 어머니에게는 모든 것이 캄캄한 절벽 같았다.
어머니는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어머니와 동행했던 범치 형과 몇 명의 원아들이 제1숙사로 돌아온 것은 밤 9시였다.
공생원에서는 원아들이 울분을 터뜨리고 있었다.
“사 목사놈, 내가 죽여버리겠어!”
재균 형은 흥분을 가누지 못했다.
“참아! 이런 때일수록 침착해야 해. 어머니가 걱정이다. 식사도 못 하시고 이대로 병환이라도 나면 큰일이야. 재균아, 바다에 가서 고기를 잡아 와라. 그걸로 죽이라도 끓여야겠다.”
범치 형이 연장자답게 제안했다.
“나도 갈래.”
평소 툭하면 내게 시비를 걸고 말썽을 피워 왔던 정철(正喆) 형이 일어났다.
모두 어머니 일을 염려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이들의 갸륵한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헤아리고 있었다.
“이대로 누워 있을 순 없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 공생원을 재건시키지 않고선 죽으려야 죽을 수도 없다.”
어머니는 아이들이 요리해 온 죽을 천천히 입으로 갖다 댔다.
비틀거리면서도 일어서려고 애쓰셨다.
“시청에 가서 협조를 구하면 어떨까? 그리고 이사들에게도 다시 간청해 보면?”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든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었다.
비틀거리는 불안한 동작이지만 원아들은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범치 형과 재균 형 등 15~6세 정도의 나이든 아들들이 어머니를 옹호하고자 모여들었다.
그들은 친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거칠 게 자라 예의범절은 모르지만, 인정(人情)에 민감하고 의리도 강했다.
어머니는 아이들이 시청이나 이사(理事) 댁에서 행패를 부리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선생님들 앞에서는 공손해야 해요.”
“어머닌 항상 그런 식이니까 손해만 보지요. 사 목사 따위 주먹 한 방이면 끝나는데.”
다혈질인 재균 형은 손을 불끈 쳐들어 때려눕히는 시늉을 했다.
“그러면 안 돼.”
어머니는 걱정스레 타일렀으나 사실 그렇게 말해 주는 아이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안이 되었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아이들과 함께 시청에 가보았으나 헛걸음이었다.
“안 됐군요. 이사회의 결정은 이미 법적(法的)인 효력을 지니게 됐습니다. 부인에겐 안 된 얘기지만 이승만 대통령께선 아직 일본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저희로선 어쩔 수가 없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였으나 어머니에게는 야속하도록 사무적인 답변이었다.
시청을 나와 공생원의 이사 댁을 찾아가는 어머니와 아이들의 발길은 무거웠다.
그러길 일주일. 이사들의 답변은 판에 박은 듯 한결같았다.
“이미 결정이 난 사실입니다. 부인의 생활비는 보조해 드리겠습니다.”
어머니는 희미하게나마 걸어온 기대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더는 움직일 기력도 없었다.
그 자리에서 쓰러지면 그대로 영원히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재균 형이 어머니의 이상을 느끼고 재빨리 부축했다.
“어머니, 제 등에 업히세요. 제가 업고 갈게요.”
그러나 아이들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간신히 입을 열어 말했다.
“재균아, 엄마 손 좀 잡아다오.”
얼마나 걸었을까?
고개 쪽에서 “어머니이-”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둠이 깔린 산마루 저편에서 목소리의 주인공이 달려왔다.
“삼주 아니니? 대범이도?”
어머니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들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 원장 선생님께 허락받고 나왔니?”
“그 사람이 무슨 원장이에요? 나쁜 사람이에요. 저희는 이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어머니랑 살래요. 어머니가 좋아요.”
“어머니가 좋아요”란 한마디.
이 한마디가 온갖 시름을 덜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너흰 돌아가야 한다. 선생님들이 걱정하셔.”
“어머니, 우리 집은 공생원이에요. 유달원 따윈 우리 집이 아니에요.”
대범이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동주도, 정철 형도, 죽 둘러선 20여 명의 아이들까지 일제히 울음을 터뜨렸다.
석양은 이미 기울어 있었다. 아이들을 이 어두운 길로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럼 하룻밤만이다. 내일 아침엔 일찍 돌아가야 해. 원에서 걱정하고 계실 테니까.”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공생원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 사 목사가 찾아왔다.
어머니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흰 저고리 깃을 여미고 밖으로 나갔다.
사 목사는 격분한 나머지 거의 자제력을 잃고 있었다.
“여자면 여자답게 굴어야지. 말 좀 삼가시오. 내가 부인의 사업을 가로챘다니요? 친구 부인이라 이제껏 정중히 대접해 왔더니만 못된 말이나 퍼뜨리고 다니다니. 저도 더는 용서 못 합니다. 그래 아이들을 어쩔 셈으로 데려갔습니까? 그 아이들이 일본 아이들입니까? 한국 아이요, 한국 고아!”
흥분을 가누지 못한 사 목사는 순간 어머니의 뺨을 후려쳤다. 안경이 떨어졌다.
느닷없는 사태에 어머니는 망연자실하여 눈물이 핑글 돌았다.
어머니는 곧 냉정함을 되찾았다.
“제가 데려온 게 아닙니다. 저 아이들이 자진해서 돌아온 겁니다. 시청을 방문하고 이사님들을 만난 것은 사실입니다. 아내가 지아비의 뜻을 지키는데 어찌 일본인과 한국인 구별이 있겠습니까?”
남편이 행방불명된 이래 오늘까지 참아왔던 슬픔과 분노가 목사의 폭력 앞에서 폭발한 것이다.
어머니는 정색하며 맞섰다.
심상치 않은 공기를 느낀 원아들이 몰려왔다.
“어머니, 왜 그러세요?”
범치 형이 쓰러져 우는 어머니를 끌어안았다.
“또 한 번 어머니께 손을 댔다간 가만 안 둘 거예요. 아무리 목사라도 우리 어머니에게 손찌검하는 건 용서 못 해요. 모두 자기 집으로 돌아온 것뿐이에요. 어머니에게는 아무 책임도 없어요.”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한 기세였다.
범치 형의 위세에 눌린 것일까? 사 목사는 말없이 물러갔다.
사라져 가는 목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은 증오심으로 이글거렸다.
이때부터 공생원의 제2, 제3숙사와 220명 아이들과는 영영 이별하고 말았다.
어머니에게 남겨진 거라곤 제1숙사와 부모 없는 아이들, 그리고 유달원을 뛰쳐나온 이십여 명의 아이들뿐이었다.
이제부터는 완전히 혼자다. 시청 직원도, 이사들도 멀어졌다. 의논 상대도 없다.
어떡하면 좋을지 앞길이 막막했다. 그러나 마음만은 신기할 만큼 평온했다.
어찌 됐거나 한고비는 넘겼기 때문이다.
남편의 체취가 스며 있는 숙사가 남아 있지 않은가?
게다가 이 숙사야말로 자신들의 집이라고 돌아온 저 많은 아이들이 있지 않은가?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고 어머니는 자신을 타일렀다.
* * *
이젠 어찌해야 좋을까? 구체적인 방침도, 대책도 떠오르지 않았다.
남편이 물려준 사업을 재기(再起)시킬 수 있을지 어머니는 자신이 없었다.
일본 여성 치즈코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인정받기 힘들었다.
차라리 죽어버리면 얼마나 편할까? 모든 것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었다.
이 고통과 굴레에서 달아날 순 없는 걸까?
남편의 사업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이 줄기차게 어머니를 괴롭혔다.
남편이 없는 지금 공생원의 모든 책임은 어머니가 떠맡고 있었다.
원내(園內) 일이라면 그런대로 끌어나가겠지만, 바깥 일을 보려면 아무래도 한국말을 사용해야 했다.
어머니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일본어를 가르쳤던 그 아이들에게서 한국어를 배우기로 했다.
막상 한국말을 배우려 하니 일제 강점기에 국어 사용 금지와 6·25 동란으로 인해 제대로 학교에 다니지 못한 아이들은 초보적인 문법도 모르고 있었다.
어머니는 우선 회화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그러나 마흔을 넘긴 어머니가 발음 공부를 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머리가 좋은 태범이가 어머니의 교수역을 맡았는데 아무리 해도 진전이 없는 것이 발음이었다.
전력을 다해 까다로운 발음을 연습하는 어머니에게 원아들은 응원을 보내는가 하면 마냥 재미있어했다.
그럴수록 어머니와 아이들의 연대감은 더욱더 깊어졌다.
어머니는 열심이었다.
어머니의 한국어 실력은 부쩍부쩍 늘어갔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그 말이 전라도 지방 사투리였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하루 일과로 아이들의 공복을 채우기 위해 시내 유지며 교회를 찾아다녔다.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닌 데 비하면 얻은 성과란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주위의 이해 부족과 전쟁으로 인심은 황폐할 대로 황폐해져 있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살기 어려울 때였다.
이해 부족으로 치면 남편 윤치호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이 없는 마당에서는 그 친구들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들은 어머니가 찾아갈 때마다 충고했다.
“부인 언제까지 이렇게 고생할 작정입니까? 공생원을 단념하고 일단 자녀들과 일본으로 돌아가는 게 어떻습니까? 일부러 고생을 사서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부모처럼 의지했던 남편 친구들의 말은 약속이나 한 듯이 한결같았다.
그들은 어머니에게 귀국을 종용했다.
선의에서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째서 한국에서 고생하는 건가? 더군다나 남편도 없는 처지에….
전쟁으로 너나없이 살기 어려운 한국에서 애써 고생할 필요가 있겠냐는 것이다.
분명 그럴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친구의 처자식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고아들이나 친구의 유업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고아 사업도 좋고 남편을 기다리는 것도 좋으나 우선은 자신을 돌보라는 것이었다.
시댁 친지들도 한결같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일본에 홀로 계신 어머니와 친구가 염려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쪽은 이미 단념한 지 오래였다.
어머니에게는 목숨을 지켜준 고아들과의 약속이 있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은 그런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어머니와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부인에겐 두 손 들었습니다. 부인 이제 아무리 노력해도 정부는 부인을 받아들여 주지 않습니다. 원장으로서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개인에게 가능한 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국가의 법률은 파기할 수 없으니까요. 부인이 일본에 돌아간다고 해도 곡해하거나 책망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안심하고 귀국하십시오.”
‘나는 주위 사람에게 짐만 되는 건 아닐까?’
어머니는 서글픈 심정이 들었다.
자신이 일본인이기 때문에 폐가 된다면 친구나 친척을 방문하는 것은 환영받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남에게 부탁하는 일은 삼가자고 다짐했다.
어머니는 범치 형과 재균 형을 불렀다.
“원장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우리 합심해서 공생원을 지키자. 원장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참고 견디는 거야. 원장님이 돌아오시면 분명 기뻐하실 거야.”
이것은 둘에게 하는 것이라기보다 어머니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것이고 결심을 다지는 말이었다.
어머니는 공생원에서 손을 떼는 일이든, 일본에 돌아가는 일이든, 누가 뭐라 하든 이후로는 일체 자신과는 무관한 일로 생각하기로 했다.
외부 정세도 공생원에서 어머니를 떼어놓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