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발자취

국경을 초월한 사랑,

한국 고아의 어머니

윤학자 여사

인연의 시작

일본 고치시에서 출생,
성장기를 목포에서 지낸 윤학자 여사는
‘아이들에게 웃음을 되찾아주기 바란다’는
은사의 권유에 따라 1936년 ‘공생원’과
인연을 맺게 됩니다.

공생원은 윤치호 전도사가
거리를 방황하던 일곱 명의 아이들과
같이 생활하게 된 것을 계기로
시작하였습니다.

제대로 된 시설조차 없는 초라한 건물에서
윤학자 여사는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공생원의 아이들은 점차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표정도 밝아졌습니다.

어느새 공생원에서 여사의 존재는 커져
친아버지처럼 아이들을 감싸고 보살피는
윤치호 원장의 청혼으로 부부의 연을 맺게 됩니다.

어려움의 시간

1945년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해방되었을 때,
윤치호 원장은 부인이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친일파로 몰려 많은 곤란을 겪습니다.

결국 다음 해 윤학자 여사는 두 명의 자녀와 함께 일본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한국에 있는 남편과 공생원의 아이들 생각을
떨쳐낼 수 없어 친어머니를 홀로 고치에 남겨두고 목포로 돌아옵니다.
늘 치마저고리를 입었던 여사의 옷에는
공생원 아이들의 냄새가 났습니다.

흔들림 없이 걷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납니다.
식량 원조를 위해 광주 도청으로 간
윤치호 원장은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그 후 400명이 넘는 고아들을 보살피는 일은
전부 윤학자 여사의 몫이 되었습니다.

도움의 손길도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는 통에
오르간이나 기모노 등 팔 수 있는 건 다 팔아
식량으로 바꾸어 살림을 꾸려나가며
필사적으로 공생원을 운영했습니다.

한국 고아의 어머니 잠들다

우리 정부는 윤학자 여사의
이러한 공로를 인정하여
1963년 8월 15일
윤학자 여사의 일본 본명인
다우치 치즈코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수여했습니다.

한국 독립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평생 헌신의 삶을 살아온
윤학자 여사는 병마로 쓰러져
1968년 공생원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