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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고아의날

 전쟁이 터졌다.

 

 그날 목포는 한여름을 연상케 하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곧장 공생원(목포 최초의 고아원) 앞바다로 달려갔다.

 

 너무나 더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땀에 찌든 몸을 바닷물로 씻어냈다.

 

 차가운 바닷물에 닿은 온몸이 순식간에 싸늘하니 시원해졌다.

 

 물놀이를 신나게 하고 기진맥진하여 물가로 올라오니 어느덧 꽤 시간이 지나간 것 같았다.

 

 ‘이젠 슬슬 가봐야지.’

 

 그런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마을 공기가 심상치 않은 것 같았다.

 

 동네 사람들이 줄을 지어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게 아닌가!

 

 양손에는 보따리를 잔뜩 거머쥐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그야말로 총출동이었다.

 

 뒤처지는 아이를 꾸짖는 듯 날카로운 외침 소리가 웅성대는 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겁먹은 얼굴로 이제 막 바다로 나온 동네 형에게 물어보았다.

 

 “형, 지금 사람들이 모두 어디 가는 거야? 무슨 일 생겼어?”

 

 “피난 가는 거야.”

 

 “피난? 왜?”

 

 “이 자식, 그것도 모르냐? 전쟁이 터졌어. 전쟁이.”

 

 “전쟁?”

 

 이제 겨우 여덟 살인 어린 나로서는 전쟁이 뭔지, 또 전쟁의 조짐 따위는 느끼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지금 서울엔 공산군이 대포랑 전차를 밀고 쳐들어와 쑥밭이 됐어. 한강 다리도 폭삭 내려앉았대. 피난민들로 아우성이란 말이야.”

 

 형은 마을 사람들의 피난 행렬을 눈으로 좇으며 말했다.

 

 “저 사람들은 목포보다 더 아래 지방으로 피난 가는 중이야. 개중에 돈 많은 부자들은 부산으로 간대. 거기서 다시 배를 타고 일본이나 미국으로 건너간다더라.”

 

 나는 급히 공생원으로 돌아갔다.

 

 공생원의 형들은 비상시를 대비해 방공호를 청소하고 있었다.

 

 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형들의 작업 모습을 가만히 구경하고 있었다.

 

 “공산군 때문에 죄 없는 우리까지 사서 고생을 하는·구나. 이렇게 찌는 날씨에 작업이라니….”

 

 형들은 한낮 땡볕 아래서의 노동에 진저리난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근데 말이야, 서울이며 대전도 모조리 공산군 놈들에게 빼앗기고 이젠 놈들이 광주까지 쳐내려와 있다더라.”

 

 “응, 마을 사람들이 그러는데 어머니 신변이 위험하대.”

 

 “왜?”

 

 “공산군은 일본 사람하고 기독교인을 특히 미워한대.”

 

 “그럼 아버지도 큰일이구나.”

 

 형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신변에 이상이 있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는 내게 공포심을 주었고, 나는 갑자기 안절부절못하게 되었다.

 

 나는 어머니를 찾았다.

 

 어머니는 창문이란 창문에 온통 한지를 바르고 계셨다.

 

 여느 때와는 달리 창가에 빙 둘러가며 다다미 병풍을 쳐놓았고 방바닥에는 이불이 깔려 있었다.

 

 “어유 어두워 엄마, 왜 이러고 있어?”

 

 어머니는 하던 일을 멈추고 나의 어깨에 두 손을 올려놓으시며 말했다.

 

 “기야, 이제부터 엄마가 하는 얘기 잘 들어야 한다. 이렇게 해둬야 포탄이 떨어져도 다치지 않는 거야. 이제부터 비행기 소리가 나면 바로 이 이불 속으로 숨어야 해. 알았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야릇한 두려움에 두 눈을 껌벅일 뿐이었다.

 

 며칠 뒤 아버지가 돌아오셨다.

 

 아버지는 완전히 거지 행색이었다. 덥수룩한 수염에, 양복이 때에 절어 구질구질하기 그지없었다.

 

 “모두에게 걱정을 끼쳐 미안하다. 어디 올 수가 있어야지. 기차고 자동차고 전부 불통이야. 걸어서 오느라 죽도록 고생만 했다.”

 

 “그러면 당신, 서울에서 목포까지 걸어서 오신 거예요?”

 

 어머니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말이 쉽지 420km나 되는 길을 꼬박 걸어서 온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전국이 불바다로 쑥밭이 된 마당에 상처 하나 없이 성한 몸으로 돌아온 것이 놀라울 정도였다.

 

 아버지의 귀가 소식은 이내 마을 안에 퍼졌다. 너도나도 안부를 물으러 달려왔다.

 

 “자네 고생이 많았지? 그래 전쟁은 언제 끝날 것 같던가? 공산군은 사람을 닥치는 대로 죽인다는데….”

 

 “제가 보니까 포탄을 짊어지고 느긋하게 걸어오던걸요. 저는 놈들보다 한발 앞서 왔는데, 아마 이삼일 뒤면 목포까지 내려올걸요.”

 

 아버지는 조심스레 입을 여셨다. 심각한 표현은 일절 삼가셨다.

 

 천연덕스럽게 상황을 재현해 보이는가 하면, 농담도 하며 연실 웃어 보였다.

 

 “자네에겐 못 당하겠네. 원, 이런 전쟁통에도 농담을 하다니.”

 

 아버지는 갑자기 어머니의 얼굴을 뚫어지라 쳐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우리 가족이 더 늘어날 거요. 정신 차리고 마음의 준비를 해 둡시다.”

 

 아버지는 피난을 전혀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말을 가로막으며 입을 열었다.

 

 “여보, 우리도 피난 가야죠.”

 

 “어디 갈 데라도 있소?”

 

 아버지는 어머니의 제안을 한마디로 일축했다.

 

 두 분의 대화를 듣고 있던 범치 형이 한마디 거들었다.

 

 범치 형은 아버지가 목포 다리 밑에서 데려온 고아들 중 한 명으로 이제는 아버지의 일을 도와줄 수 있을 만큼 성장해 있었다.

 

 “저희는 여기 남아서 꼬마들을 지킬 테니까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서 피하세요. 놈들은 기독교인이나 일본인은 눈에 띄는 대로 처형한대요.”

 

 어머니가 다시 애원했다.

 

 “여보, 제발 부탁이에요. 이번만은 제 말을 들어주세요.”

 

 “이 많은 아이들을 데리고 대체 어딜 갈 수 있단 말이오? 피난길에서 당하느니 차라리 여기 눌러있는 게 낫소. 우리 식구 살자고 이 많은 아이들을 버릴 순 없소.”

 

 그러나 어머니도 이번만은 완강했다.

 

 “당신은 한 몸이 아니잖아요? 청미, 기, 향미, 그리고 영화는 어쩌고요? 모두 당신 자식이에요.”

 

 평소 말이 없던 어머니의 필사적인 애원에도 아버지는 묵묵히 있었다.

 

 “당신이 변이라도 당하면 저 어린것들은 어떡하라고요.”

 

 그러나 아버지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치즈코(千鶴子), 용서하오. 모든 일은 하나님께 맡기기로 하자고. 공산군도 죄 없는 고아들을 설마 죽이기야 하겠소?”

 

 “여보! 전들 가고 싶어 가나요? 단지 전 당신 일이 걱정될 뿐이에요. 당신만 무사하시다면 이런 걱정은 하지 않아요.”

 

 마침내 어머니는 울먹이고 말았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결심이 여간해서는 바뀌지 않으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내로서, 또한 자식을 거느린 어머니로서 쉽게 단념할 수만은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모든 게 끝장이었다. 앞으로 어찌 될지 캄캄하기만 했다.

 

* * *

 

 7월 27일 그날도 여전히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멀리서 뱃속까지 울리는 듯한 대포 소리가 ‘쿵쿵’하고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대포 소리가 날 때마다 어머니는 이불을 끌어당겨 숨도록 했다.

 

 ‘쿵쿵’하는 대포 소리와 함께 간간이 비행기 소리도 들렸다.

 

 주위의 심상찮은 소리에 네 살배기 여동생 향미가 울어대기 시작했다.

 

 주위의 공기에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재균 형이 숨을 헐떡이며 집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마도 시내에서 중 대한 정보를 듣고 온 모양이었다.

 

 “원장 아버지! 큰일 났어요. 선창 부근의 발전소가 폭격을 당했어요. 근처가 온통 불바다예요. 드디어 공산군이 목포에 쳐들어왔대요.”

 

 재균 형은 상기된 얼굴로 단숨에 많은 말을 쏟았다.

 

 “알겠다. 자, 이제부터 너희들도 함부로 외출하지 말거라, 알겠지?”

 

 “네에”하고 합창하듯 일제히 대답하는 원아들의 얼굴에는 불안감이 감돌았다.

 

 공산군은 어느새 공생원 운동장에까지 진입했다. 원아들은 겁에 질린 나머지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나는 돌담 뒤에 몸을 숨기고 동정을 살폈다. 자꾸만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때였다. 이쪽저쪽 사방에서 마을 사람들이 비실거리며 운동장 가운데로 끌려 나왔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안면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온몸이 떨리다 못해 오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끌려 나온 무리 중에는 아버지와 어머니도 끼어 있었다.

 

 그것도 맨 앞줄에 서 있다니….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였겠지?”

 

 공산군의 지휘자인 듯한 눈매가 매서운 한 군인이 연설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내 귀에까지 날아와 꽂혔다.

 

 “친애하는 남조선 인민 동지 여러분. 우리 북조선 인민군은 남조선 인민을 해방하기 위해 내려왔습니다. 나는 최 중위라고 하오. 에, 지금부터 우리 인민을 약탈하고 인민의 적인 반동분자의 재판을 시작하겠소. 인민 동지 여러분! 여기 있는 반동분자 새끼를 똑똑히 봐두시오!”

 

 나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가 손가락질한 사람은 바로 아버지와 어머니였다.

 

 “이 반동은 인민을 착취했고, 해방 후에는 이승만 괴뢰 정권에 가담하여 사회사업이라는 가면을 쓰고 인민이 피땀 흘려 모은 금전을 갈취한 악질 반동분자요. 게다가 그의 처 치즈코는 우리 민족의 철천지원수인 일본 사람이오. 이것만 봐도 총살감이오.”

 

 사람들이 웅성댔다. 최 중위는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우리 위대한 김일성 수령님은 인민재판을 열어 인민의 뜻을 존중하라고 훈시하셨소. 그래서 우리는 이 자리에서 인민재판을 열고자 하오. 윤치호를 반동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손을 드시오.”

 

 최 중위의 도전적인 음성은 운동장 구석구석까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마을 사람들은 떨고 있었다.

 

 모두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손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 손을 들지 않는 거요? 동무들도 반동의 편을 드는 거요?”

 

 최 중위는 노기에 찬 눈을 부라렸다.

 

 험악한 얼굴이 당장에라도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았다.

 

 잠시 정적이 흘렸다. 나는 완전히 공포에 질려 있었다.

 

 잠시 후 한 남자가 일어났다. 동사무소 서기· 나 씨였다.

 

 “군관 선생,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군관 선생이 뭐요? 군관 동지요, 동지.”

 

 “알겠습니다. 군관 동지. 지금 윤치호 선생이….”

 

 “이보시오! 몇 번을 말해야 알겠소? 선생이 뭐요! 동지라 부르시오.”

 

 “알았습니다. 윤 동지는 구장을 지냈습니다만, 실제로는 불쌍한 고아들을 위해 애써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윤 동지의 부인도 일본인이긴 하지만 고아들을 위해 헌신해온 고마운 분입니다. 특히 윤 동지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까지 독립운동을 위해 몸 바친 애국자입니다.”

 

 “옳소!”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손뼉을 쳤다.

 

 “저의 발언은 이상입니다. 제 말에는 추호도 거짓이 없습니다. 최 동지, 모쪼록 목포 시민을 위해, 그리고 고아들을 위해 윤 동지에게 관대한 처분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진지한 얼굴로 말을 끝낸 나 씨는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호흡이 멎을 듯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 정적을 깨기라도 하는 듯 최 중위는 지휘봉으로 딱 하고 손바닥을 내리쳤다.

 

 최 중위의 입가에 비웃음과도 같은 미소가 번지더니,

 

 “알았소. 내게도 생각이 있소. 윤 동지에겐 죄목이 얼마든지 있소. 단 나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눈감아줄 수도 있소. 자, 윤 동지, 우리 인민 위원장직을 맡아주시오.”

 

 하며 번득이는 눈매로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아버지는 흠칫 놀라 ‘내가?’라는 듯 최 중위를 쳐다보았다.

 

 뜻밖의 상황에 아버지는 할 말을 잃으신 모양이었다.

 

 어머니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아무 말이 없다.

 

 최 중위는 교묘하게 아버지를 어려운 협상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어머니는 질린 표정으로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건에 응하지 않는 한 이 자리를 모면할 길이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윽고 아버지가 최 중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최 동지! 좋소이다. 내가 위원장이 되겠소. 하지만 내게도 조건이 있소.”

 

 “뭐요? 말하시오.”

 

 최 중위는 불쾌한 표정을 확연히 드러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고아들에게 식량을 대줄 것! 그리고 죄 없는 사람은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 주시오.”

 

 최 중위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일그러진 웃음을 지었다.

 

 “아니? 우리 인민군을 뭐로 보는 거요. 죽이려 들면 언제든 죽일 수 있는 게 우리요.”

 

 아버지는 꼿꼿한 자세로 최 중위를 직시하며 말했다.

 

 “이 윤치호는 목숨이 아까워서 굴복하는 게 아니오. 거듭 말하거니와 인민 위원장의 동의 없이는 한 사람도 죽이지 않겠다는 조건이라면 수락하겠소.”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결코 호락호락 굽힐 수 없다는 단호함이 깃들어있었다.

 

 최 중위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좋소. 약속해 드리지. 오늘의 인민재판은 정말이지 민주적이오. 그럼 다음! 윤 동지의 처, 저 일본 여성 동무에 대한 재판을 시작하겠소. 여성 동무를 어떻게 처단해야 할지는 어떻소? 위원장 동무가 맡아 해 주시오.”

 

 “아니 나더러 내 처를 재판하란 말이오?”

 

 “우리 인민 공화국의 원칙이오. 자, 어서 시작하시오.”

 

 최 중위는 신경질적으로 명령했다.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아버지와 어머니 쪽으로 쏠렸다.

 

 어머니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나는 당장에라도 뛰어나가 어머니를 붙잡고 싶었다.

 

 아버지 안색 역시 긴장으로 창백해 있었다.

 

 마음을 가다듬는 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 제 처를 처형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아버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무도 손을 드는 사람이 없었다.

 

 “찬성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시지요? 그럼, 위원장의 이름으로 윤학자의 무죄를 확정하겠습니다.”

 

 “잠깐.”

 

 아버지가 말을 채 맺기도 전에 최 중위가 살기에 찬 음성으로 불쑥 끼어들었다.

 

 “기다리시오! 윤 동지, 우리 신성한 인민재판에서는 죄가 없다는 사실을 변론하지 않으면 무효요. 윤학자 반동에 대한 변론이 아직 없지 않소? 변론 내용이 인민들에 의해 인정되었을 때라야 비로소 무죄로 결정할 수가 있단 말이오.”

 

 한낮 염천(炎天) 아래의 이 해괴한 재판에 마을 사람들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을 생각도 잊은 채 숨을 죽이고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급기야 터지려는 울음을 삼키며 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최 중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변론해도 좋겠습니까?”

 

 “아, 괜찮소! 해 보시오. 위원장 동무가 처의 변론에 나서다! 이것 참 재미있는 일이구만.”

 

 최 중위의 비아냥거리는 대답이었다.

 

 아버지는 침착한 음성으로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을 시작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제 처는 일본 사람입니다. 제 처는 일본 사람들이 우리 민족을 탄압하고 박해하던 때 주위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저와 결혼했으며, 오늘까지 저 이상으로 고아들을 위해 몸 바쳐 왔습니다. 저는 그녀의 남편으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한국인으로서 그녀를 존경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여기까지 말하고,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혹 이 중에 제 아내가 일본인이기 때문에, 그 이유 하나로 사형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한 분이라도 계신다면 주저 말고 손을 들어주십시오. 단 제 아내를 사형하기 전에 먼저 저를 사형시켜 주십시오.”

 

 숨을 죽이고 엿보고 있던 내가 보기에도 그것은 당당한 변론이었다.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감동하고 있었다.

 

 신뢰에 찬 눈길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 둘 박수 소리가 높아지더니 마침내는 일제히 기립했다.

 

 “알았소. 인민 동지 여러분이 윤 동지의 변론을 인정한 거로 하겠소. 자, 이 건은 더 이상 거론하지 않도록 하겠소.”

 

 마을 사람들의 얼굴마다 기쁨과 안도의 빛이 돌았다.

 

 마을 사람들의 지지와 아버지의 변론으로 가까스로 결정적인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두 분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면 두 분은 이때 명(命)을 다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적어도 훗날의 고통은 겪지 않았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