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군의 지배는 불과 두 달 남짓했다.
그동안에도 전쟁고아는 잇달아 발생하고 있었다.
엄청난 수의 고아가 목포로 모여들었다.
아버지는 고아들을 거부하는 일이 결코 없었다.
공생원은 몰려든 고아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아버지의 가장 큰 고민은 이들의 식량을 확보하는 문제였다.
아이들의 생명과 직결되는 것이기에 더욱더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공산군의 지배하에 들어가고부터 마을에는 갖가지 알력이 발생했다.
모든 결정은 아버지의 책임이 필요했다.
아버지는 잠시도 쉴 여가가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여유 있게 식사하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2개월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1950년 9월 15일 연합군의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적의 손아귀에 들어갔던 한반도에는 다시 자유의 깃발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목포를 점령하고 있던 공산군도 하룻밤 사이에 자취를 감췄다.
공산군 치하에서 해방된 목포 시민의 기쁨은 대단했다.
그러나 시민의 기쁨이 가라앉을 즈음 시내는 또 다른 사건으로 술렁거렸다.
국군 특무대가 공산 치하에서 부역한 시민을 수색하여 간첩 용의자 체포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 불명예스러운 용의자로 아버지가 체포되었다.
공생원은 초상집처럼 암울한 공기로 뒤덮였다.
어머니는 매일 아침 범치 형과 시내로 나갔다가 어두워져야 귀가하곤 했다.
“오늘은 어떠셨어요?”
재균 형이 어머니를 맞으며 걱정스레 물었다.
“이 목사님이 방첩 대장의 면회를 주선해 주셨다만 정국이 이런지라 좀체 힘들다는 말씀이셨다.”
재균 형이 분개하며 말했다.
“아무 죄도 없는데 어째서요?”
어머니가 조용히 설명하듯 말했다.
“기독교 신자인 데다 고아 사업을 하는 분이라 석방해 드리고 싶지만, 인민 위원장을 지냈다고 세평이 좋지 않으니 저들로서도 손을 쓸 수가 없대. 설사 지금 석방된다 해도 양쪽에서 당하기만 할 테니 차라리 방첩대 안에 있는 편이 안전하다는 말씀이셨어.”
“하지만 공산군에 협조한 사람은 트럭에 실려 가 처형된다는 소문이에요. 원장 아버지도 언제 당할지 모르잖아요.”
재균 형은 볼멘소리에 못내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절박한 분위기를 느낀 원아들이 불안한 얼굴로 모여들었다.
“이런 시국에 고아 사업이 다 무슨 소용이냐? 고아 사업이네 뭐네 하고 있으니 이렇게 고생하는 거 아니냐?”
고모님은 아예 땅바닥에 주저앉아 땅을 치며 애통해하셨다.
범치 형이 분위기를 무마시키려는 듯 나섰다.
“고모님, 어머님 심정도 생각해 주셔야죠. 우신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잖아요.”
고모는 더욱 언성을 높였다.
“아범에게 무슨 죄가 있냐. 죄가 있다면 고아들 데려다 키운 죄밖에 없는데.”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목사님들이 원장님 구명 운동에 나서서 힘쓰고 계시니까 조만간에 풀려나오실 거예요. 너무 심려 마세요, 고모님.”
“이런 긴박한 시기에 어째서 유지들은 나서지 않는 거냐? 치호의 도움을 받은 이들이 한둘이 아닌데….”
고모는 애통함을 가누지 못해 펄펄 뛰셨다.
범치 형도 더는 어쩌지 못하겠다는 기색이었다.
아버지가 체포된 지 어느새 두 달이 지났다. 추운 겨울이 닥쳐왔다.
새해 들어서부터 목포 일대에는 보기 드문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공생원 뒤편의 유달산 고갯마루에 오르면 등 뒤에서 휘몰아치는 바람이 한층 매서웠다.
재균 형을 뒤쫓아서 나는 미끄러지듯 고개를 내려갔다.
왼쪽 어깨에 둘러멘 구두통이 허리춤에서 덜거덕덜거덕 소리를 내고 있었다.
동란이 터진 지 6개월, 공산군과 연합군이 벌이는 사투(死鬪)는 사그라들 줄 모르고, 피와 화염으로 적셔진 한반도의 새해는 혹한과 기아 속에서 밝아왔다.
20여 분쯤 걸었을까? 큰길이 나타났다.
길가의 빵집에는 개점 시간도 아닌데 줄을 선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배급을 타려고 기다리는 행렬이었다.
우리는 더욱 발걸음을 재촉했다.
드디어 군 본부가 주둔해 있는 방첩대 건물 앞에 이르렀다.
우리는 우선 햇볕이 잘 드는 담벼락을 물색했다.
좋은 길목을 골라잡고 그곳에 진을 치기 위해서다.
구두닦이의 단골은 대부분 군인이었다.
그 때문에 구두닦이들에게 있어 이곳은 최고의 명당이었다.
재수가 좋을 땐 미군 병사의 워커를 닦아주고 팁으로 초콜릿도 얻어먹곤 했다.
재균 형과 나는 두 달 전부터 이곳에 거르지 않고 출근하고 있었다.
“형, 오늘은 우리가 일등이다. 응?”
“오늘같이 추운 날 이렇게 일찍 나오는 녀석이 어디 있겠어?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고 있겠지.”
오전 중에는 손님이 없었다.
그러나 눈발이 그치고 오후가 되자 거리는 행인의 발길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구두 닦으세요. 아저씨 번쩍번쩍하게 닦아드릴게요.”
재균 형은 구두닦이 해서 번 돈으로 호빵을 사다 주었다.
하루 두 끼 죽 먹기도 힘든 시절이었으므로 호빵을 보는 것만으로도 입안에는 군침이 가득 괴었다.
슬슬 시장기가 돌기 시작할 시간이었다.
길을 지나가던 키 큰 군인 한 명이 획 돌아서더니 손짓을 했다.
따라오라는 신호다. 형과 나는 재빨리 뛰어갔다.
방첩대 안에 들어가 보기는 난생처음이었다.
이곳에 아버지가 계신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쿵쿵 뛰었다.
키 큰 형의 꽁무니를 쫓아 나는 두 눈을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레 들어갔다.
긴 복도 끝에 방이 있었고, 방에 들어서니 내 키만큼 큰 책상이 우리를 압도했다.
찬찬히 바라보니 군인의 군복 상의에는 수많은 배지가 빛나고 있었다.
늠름한 군인이었다.
형과 나는 즉시 구두 닦을 준비에 착수했다.
나는 너덜너덜한 헝겊 조각에 구두약을 잔뜩 묻혀 형에게 건네주었다.
그걸 받아 든 형은 구두를 뚫어지라 쳐다보면서 손가락을 유연히 놀리기 시작했다.
키다리와 땅딸보 콤비의 행동에 흥미를 느낀 걸까? 군인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희들은 형제냐?”
“네, 형제는 형젠데요. 부모님이 다른 형잽니다.”
재균 형의 대답이었다.
“세상에 그런 형제가 어디 있어? 너희들 부랑배구나?”
“아네요! 저희는 공생원이란 고아원에 살고 있는데요, 이 꼬마는 원장님 아들이고요, 우리랑 함께 원에 살고 있어요.”
군인이 놀라는 얼굴이었다.
“아니, 공생원이라면 저기 바닷가에 있는 고아원 말이냐?”
“네, 그래요.”
“어떻게 아세요?”
이번에는 내가 끼어들었다.
“너희들은 잘 모르겠지만 내가 학생 시절에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였단다. 그 당시 나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쫓겼지. 그러다 공생원에 숨어 들어간 거야. 원장 선생님은 나를 사흘씩이나 숨겨주셨지. 그분 존함이… 윤…치호 씨라 기억되는데 아직도 생존해 계시는지 모르겠구나.”
군인은 아득한 옛일을 회상하는 듯했다.
“군인 아저씨! 바로 이 아이가 원장님 아들이에요.”
군인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작은 나를 안아 올렸다.
“네가? 그럼 네 아버지는 어떻게 되셨지? 전쟁으로 변은 당하지 않으셨니?”
형이 대신 대답했다.
“살아 계세요. 지금 여기에 잡혀 와 계십니다.”
“여기에? 아니 무슨 일로?”
“모르겠어요. 지난 11월 초에 군인이 여러 명 와서 붙잡아 갔어요.”
재균 형이 호빵 자루를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아버지께 이걸 좀 전해 주세요.”
“이게 뭐지?”
“차입이에요.”
군인은 곧 부하를 불러 아버지 일을 확인하고는 방까지 모셔오도록 명령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던 걸까? 한 대위라고 밝힌 그 군인은 그날 방첩대에 발령을 받고 부임해 온 이전의 독립 운동가였다.
문이 열리고 아버지의 얼굴이 나타난 순간 형과 나는 동시에 달려갔다.
“아빠!”
“아버지!”
나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두 손을 붙들고 가슴에 머리를 파묻은 채 울먹였다.
“재균이랑 기, 너희가 웬일이냐. 응? 어떻게 너희들이 이곳에 들어왔어?”
내가 뒤돌아 한 대위 쪽을 가리켰다.
그때까지 이 모습을 말없이 지켜 보고 있던 한 대위는 천천히 아버지를 향해 다가왔다.
“윤 선생님 저 알아보시겠습니까? 한동운입니다. 그때는 정말 고마웠습니다. 일본 경찰에 붙잡힌 뒤 저는 무엇보다 선생님의 뒷일이 걱정되어 불안했습니다. 고생은 안 하셨는지요?”
“아! 한 군, 기억하고말고.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묘한 인연이군. 갖가지 사건이 있었네만 다 지난 일이지.”
아버지와 한 대위는 서로의 감회를 악수로 확인했다.
3개월에 가까운 감옥 생활로 작은 체구의 아버지는 여윌 대로 여위어 한층 왜소해진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나 음성만은 여전히 당당하고 위풍이 있었다.
흐트러짐 없는 아버지였다.
“그래도 당시엔 그나마 희망이 있었지. 4천만 동포를 하나로 뭉치게 하는 꿈이 있었네. 하지만 지금은 피비린내 나는 살인과 불신으로 점철되어 있어.”
한 대위도 동감했다.
“맞습니다. 어째서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눠야 하는지 안타까울 뿐입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오.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최상이라고도 생각지 않소. 가난한 사람들은 그날 먹을 식량조차 없소. 민주주의건 공산주의건 그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오. 주의, 주장도 그들에겐 한낱 사치에 지나지 않소.”
한 대위가 존경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윤 선생님은 예전과 하나도 달라진 게 없으시군요.”
수의를 걸친 아버지는 오늘에야 겨우 동지를 찾은 것일까? 열띤 음성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왜정 때는 일본 순사에 시달리고, 6·25 동란이 터지니 공산군에, 그리고 이번엔 국군에게 붙잡혀 고생하고 있으니 이 민족의 운명이 서글퍼 견딜 수가 없네.”
한 대위는 아버지의 열변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말씀이 끝나자 한 대위는 어머니의 안부를 물었다.
“그때의 일본 여성이 사모님이 되신 겁니까?”
“그렇다네.”
“찾아뵙고 인사드려야겠습니다. 아드님이 구두닦이를 하는 걸 보니 사모님의 고생이 어떠하실지 짐작이 갑니다.”
한 대위는 그날로 공생원을 방문했다. 원아들을 위한 식량을 잔뜩 들고서.
어머니는 뜻밖의 방문에 기뻐 어쩔 줄 모르셨다.
실의와 좌절에 빠진 아버지와 공생원의 앞날에 한 줄기 광명이 찾아든 느낌이었다.
* * *
한 대위의 협력과 시내에 계신 일곱 분의 목사님의 서명 운동을 벌인 결과 아버지는 석방되었다.
1월 24일의 일이었다.
석방된 지 이틀 뒤, 아버지는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목포에서 90km 떨어진 광주 도청으로 출장을 나가셨다.
3개월에 걸친 감옥 생활로 아버지의 몸은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으나 원의 사정은 아버지를 편히 쉬게끔 내버려 두지 않았다.
당장 내일 먹을 음식이 없었다.
아버지는 이웃 마을에 잠시 나들이 나갈 때처럼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어머니는 이 출장을 극구 만류했다.
아버지의 몸이 쇠약하다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아직 퇴각하지 않은 공산군 잔당이 다수 숨어 있다는 소문이 자자한 터라 다분히 위험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머니의 만류를 듣지 않았다.
눈 덮인 산길을 두 사람이 걷고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 둘이서 걷는 게 몇 년 만인가? 어머니에게는 기억조차 아련했다.
“정말 꿈만 같구려. 다신 세상을 못 볼 줄 알았소.”
아버지는 자신이 구금돼 있던 3개월이 아내와 공생원에 얼마나 큰 고통과 불안을 안겨주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미안하오. 당신에겐 고생만 시켰어. 광주에서 돌아오면 그땐 꼭 당신 곁에 있겠소.”
“당신두. 언제 제 곁에만 있어 달라 그랬나요? 당신 일이 걱정돼서 그렇죠.”
어머니는 아버지의 광주행 출장에 대한 불안을 영 떨칠 수가 없었다.
“잘 알고 있소. 당신의 마음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소.”
어머니는 힘주어 말했다.
“집 걱정은 마시고 속히 다녀오세요.”
목포역에 도착했다. 광장은 인파로 붐볐다.
“뭘까요, 여보?”
어머니와 아버지는 군중 쪽으로 다가갔다.
한 엿장수가 엿판을 땅바닥에 내려놓은 채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네 이놈! 당장 엿값을 변상하지 못해?”
“뭣이 어째? 두 눈 멀쩡히 뜨고도 똑바로 걷지 못한 놈이 누군데!”
길바닥에는 엿가락이 산산이 흩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그냥 보고 지나칠 수 없었던지 한마디 했다.
“여기도 또 전쟁이오? 이제 전쟁은 진저리나지도 않소?”
땅바닥에 널린 엿을 주워 후- 하고 먼지를 털어 한입에 털어 넣었다.
“괜찮구먼. 엿 속까지 먼지가 들어간 것도 아니고. 이 엿 전부 얼마요? 내가 사겠소.”
엿장수는 두 눈이 휘둥그레져 아버지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여보, 정말 사실 생각이에요?”
“그럼 정말이지. 전부 얼마요?”
“아이고, 황송합니다. 이 전쟁통에 인정(人情)이 씨가 말라버린 줄 알았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엿장수는 돈을 보고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리며 아버지를 추켜 올렸다.
엿은 눈 깜짝할 사이에 수집되어 어머니의 손에 넘겨졌다.
아버지는 떠나셨다.
엿 보퉁이를 들고 혼자가 된 어머니는 공생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뚜- 하는 기적이 울렸다.
어머니는 고개를 돌려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윤치호의 모습은 기차와 함께 멀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