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만 묵고 오겠다던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고 이 주일이 지나도 아버지는 무소식이었다.
아버지는 일단 외출하면 일주일 혹은 한 달씩이나 기별이 없는 날이 많았다.
여느 때 같으면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버지는 석방되어 나온 지 불과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
당연히 신변 안전이 문제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직도 일부 공산군은 산이며 지하 조직에 숨어 있었고, 그들은 올빼미같이 밤이면 나타나 주민을 학살하는 사건을 빈번히 자행했다.
피비린내 나는 혼란이 거듭되고 있었다.
50m에 한 명씩 공산군 잔병(殘兵)이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어머니는 원아들 앞에서는 결코 불안한 내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과가 끝나고 밤이 오면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쳐들고 일어나 불안감에 몸서리쳤다.
고통스러운 나날이 쌓이고 아버지의 소식이 끊긴 지도 어느새 한 달이 넘어서고 있었다.
어머니는 더는 가만히 앉아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이 신변에 이상이 있는 게 분명해!”
불안함은 확신으로 바뀌어 갔다.
어머니는 재균 형과 함께 광주로 나갔다.
재균 형은 아버지와 동행하여 광주에 여러 차례 다녀온 적이 있었고 지리에도 밝았다.
먼저 김신근 목사님을 찾아뵙기로 했다. 이것은 순전히 재균 형의 육감이었다.
아버지는 광주에 도착하면 으레 김 목사님을 방문하곤 했기 때문이다.
재균 형의 추측은 맞아떨어졌다.
목사님은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내심 놀란 듯했다.
재균 형이 어머니를 대신해 물었다.
“목사님, 저희 아버지가 며칠째 소식이 없습니다.”
김 목사님은 크게 걱정할 것 없다는 태도였다.
“그 사람 참! 일이 끝나면 곧바로 집으로 들어갈 것이지….”
“어머니 말씀으로는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하룻밤만 묵고 돌아오겠다며 나가셨대요.”
목사님은 안심시키려는 듯 조용히 말했다.
“아, 윤 원장 그 사람이 어디 약속 같은 걸 하고 떠나던가? 약속 따윈 애당초 무리지. 그 사람은 불쌍한 이웃을 구제한다는 생각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라서.”
재균 형은 다소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그럼 서울에라도 가셨을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너무 걱정하지 말게. 윤 원장이 왔다 간 건 벌써 한 달도 더 된 일이고 그때는 거지 행장으로는 도청에 갈 수 없으니 옷을 빌려달라고 찾아왔었네. 그래서 내 옷을 빌려줬지.”
재균 형은 다짐하듯 물었다.
“그래요? 그럼 도청에 가긴 가셨군요.”
어머니는 시종 입을 다물고 있었다.
김 목사님이 뒤따라 나오며 배웅하실 때도 굳어진 표정으로 눈인사만 할 뿐이었다.
그 길로 곧장 도청으로 향했다.
도청에서도 어머니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재균 형은 어머니를 사회과로 안내했다.
“과장님 안녕하셨어요? 어머니도 함께 오셨어요. 아버지가 아직 돌아오시지 않아 찾아왔어요.”
재균 형의 이야기를 들은 사회과장도 그다지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다고요? 식량 조달을 의뢰해 놓고, 다음날 받으러 오지 않길래 급한 용무라도 생겼나 보다 생각했지요.”
“그럼, 내친걸음에 그 식량은 저희가 인수해 가겠습니다.”
재균 형은 머리 회전이 빨랐다. 그날로 식량은 사회과장의 주선을 통해 한발 앞서 공생원에 보내졌다.
아버지의 행적은 찾을 길이 없었다.
도청에 들른 차에 중앙교회의 목사님을 찾아갔다.
목사님은 아버지의 당일 행적을 일러주셨다.
“그러니까 수요일이었군요. 저녁 예배 때 윤 원장이 왔었지요.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둘 다 공산 치하에서 고생이 많았다며 두 손을 맞잡고 재회의 기쁨을 나눴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윤 원장은 한양여관에 머문다며 돌아갔는데요.”
어머니의 마음은 이미 한양여관으로 날아가 있었다.
그 여관은 중앙교회 바로 맞은편에 있는 허술한 싸구려 여관이었다.
여자의 예감이랄까? 어머니는 남편을 광주로 보냈던 자신을 책망하며 후회하고 있었다.
머리가 벗겨진 대머리 여관집 주인은 재균 형을 보자 한눈에 알아봤다.
재균 형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우리 아버지 일 때문에 왔어요.”
“왜, 아버지가 어떻게 되셨냐?”
여관 주인이 굵직한 목소리로 되물으며 현관으로 나왔다.
“이분은 저희 어머니세요.”
재균 형은 어머니를 소개했다.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늘 사모님께 고생만 시키고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더군요. 윤 원장님이 광주에 오시면 웬만한 사람들은 다 찾아왔지요. 윤 원장 하면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 돕기로 널리 알려져 있으니까요.”
여관 주인은 이야기를 무척 즐기는 사람 같았다.
잠자코 듣고 있다간 아버지의 칭찬이 끝이 없을 듯싶었다.
“인사는 그쯤 하시고 아저씨, 우리 아버지 어디 가신지 모르세요?”
재균 형이 말허리를 끊으며 물었다.
“글쎄다. 여기에 보따리를 남겨둔 채 나간 후 연락이 없기에 목포로 내려가신 줄 알았는데….”
“아저씨! 글쎄가 아니라 정확히 언제 와서 어느 날 몇 시에 나갔는지 말씀해 주세요.”
재균 형은 큰소리로 추궁하듯 물었다.
“서둘지 좀 말아라. 윤 원장이야 항상 자기 집 드나들 듯 예고 없이 나갔다가 들어오곤 해서 나도 그러려니 생각하고 있었지. 아, 찾아오는 사람이 한둘이어야지. 한밤중이건 새벽이건 구분이 없었으니까.”
재균 형은 다시 다그치듯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아이고, 좀 잠자코 있어라. 찬찬히 생각 좀 하게. 그러니까 그게… 그날 수요 예배에서 돌아온 윤 원장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한 12시나 되었을까? 청년 셋이 찾아왔었지. 잠시 있으려니까 윤 원장이 옷을 주워입고 나가더구나. 나는 목포에 무슨 일이 생겨 모시러 왔나 보다 생각했지.”
어머니는 전신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눈앞이 캄캄해져 그 자리에 주저앉으려는 것을 재균 형이 재빨리 부축했다.
아버지가 묵고 있던 방의 한편에는 보퉁이와 모자만이 주인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듯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 * *
어머니는 재균 형의 부축을 받고 공생원으로 돌아왔다.
평소 말이 없으신 어머니였지만 아버지의 신변에 대한 초조감과 슬픔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어머니와 재균형의 이야기를 들은 원생들의 낙심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버지에 관한 소문은 각양각색으로 떠돌았다.
부산에서 봤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군산에서, 또 서울에서 봤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마다 어머니의 가슴은 한없이 동요했다. 당장이라도 그곳에 가 수소문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들만 남겨두고 갈 수 없는 어머니이기에 안타까움은 더욱 컸다.
공생원에서 복작거리며 사는 대식구는 항상 식량에 쪼들렸다.
어머니로서는 단 한 가지 길밖에 없었다. 직접 식량을 조달하는 것.
돈이 될 만한 물건은 모조리 내다 돈으로 바꾸었다.
결혼 당시, 지금은 고치(高知)에 계신 친정어머니가 보내준 오르간도 처분했다.
의복도 팔았다. 이제 팔 만한 물건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최후의 방법으로 식솔을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80명의 원아들 중 10살 이상의 아이들만 강당에 집합시켰다.
모두 50명이었다.
“여러분, 제 얘길 잘 들으세요. 공생원이 힘들어 우리는 오늘부로 잠시 헤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싫어서가 아닙니다. 비록 헤어져 살더라도 죽지 않는 한 다시 또 만날 수 있습니다. 물론 밤엔 예전처럼 여기서 함께 자도 좋습니다.”
어머니는 아이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차근차근 이야기를 계속했다.
“저는 내일부터 리어카를 끌고 시내에 나갈 겁니다. 찬밥이든 더운밥이든 요기가 될 만한 것을 얻어다 아이들에게 먹여야 하기 때문이에요. 우리 서로 형편이 좋아질 때까지 조금만 참고 견딥시다.”
어머니는 다음날부터 실행에 옮겼다.
새벽이면 리어카를 끌고 나가 밤중까지 이 집 저 집을 헤맸다.
그것은 거지의 구걸이었다.
구걸하면서 어머니는 틈틈이 시간을 내어 목포 시청을 찾아가 식량을 원조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회과의 김 주사가 반가운 소식을 전해 왔다.
“어쩌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원조 신청서를 제출해 보시죠.”
어머니는 난관에 부딪힌 원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하는 것처럼 느꼈다.
기대감과 함께 가벼운 흥분이 일었다.
철야 작업으로 서류를 정리하여 이튿날 아침 김 주사에게 들고 갔다.
그는 서류에 눈길을 못 박은 채 난처한 얼굴을 했다.
“왜 그러시죠?”
영문을 몰라 묻는 어머니에게 김 주사는 차마 말하기 거북하다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허, 글쎄 이게… 부인, 이 이름으로는 좀….”
“이름이 어쨌다는 거죠?”
그가 뭘 말하려는지 어머니로서는 도무지 짐작 가지 않았다.
“윤 원장이 행방불명된 사실은 목포 시민 백이면 백 사람이 다 알고 있습니다. 본인이 부재중인 상태에서 윤 원장 명의의 서류 신청을 받긴 곤란한데요.”
딴은 그런 것 같았다. 하지만 윤치호가 아니면 대체 누가 공생원을 대표할 수 있다는 건가?
어머니로서는 납득할 수 없었다.
“저….”
어머니는 낮은 목소리로 제의를 했다.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제가 대리 원장을 맡으면 안 되겠습니까?”
김 주사는 두 눈을 깜박이며 생각에 잠기더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지금 부인의 호적은 어떻게 돼 있는지요? 일본인으로는 그게 좀….”
그렇다. 어머니는 자신이 일본인이란 사실을 잊고 있었다.
어머니는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같이 얼떨떨한 느낌이었다.
김 주사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다.
“사모님께는 죄송합니다만, 누군가 대리를 부탁할 분 없겠습니까? 목사 같은 직위에 계신 분을 내세우면 미국 원조도 가능합니다.”
목사라면 남편이 구금됐을 때 석방 운동을 벌여주신 분들도 있고 예부터 친분을 가져온 분들도 여러분 계셨다.
그러나 용단이 내려지지 않았다.
“잘 생각해 보시고 다시 한번 들르십시오.”
목포 시청에서 새로운 문제에 부딪힌 어머니는 말없이 시청을 나왔다.
대리 원장! 어머니는 남편 이외의 공생원 원장이란 생각할 수가 없었다.
무거운 발을 끌다시피 하여 고개를 내려오면서 중얼거려 보았다.
“대리 원장?”
서러운 감정에 당장이라도 눈물이 솟구칠 것 같았다.
무력한 자신이 한없이 슬퍼졌다.
남편이 돌아오면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공생원의 숙사가 내려다보이는 고갯마루에 선 채 아득히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발길은 좀처럼 움직일 줄 몰랐다.
* * *
그날 밤 아이들이 취침에 들 무렵 어머니는 등잔불 밑에서 옷을 깁고 있었다.
어머니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 나는 왠지 마음이 편해 왔다.
“어머니 큰일 났어요.”
옥순이가 뛰어 들어오며 말했다.
우뚝 선 채 겁먹은 눈으로 어머니를 보았다.
“무슨 일이지?”
“어제 들어온 아기가 이상한 것 같아요. 빨리 가보세요.”
영아들 방은 어머니 방과 바로 이웃해 있었다.
어머니는 갓난아기의 이마에 손을 얹어보았다.
“열이 있구나. 폐렴은 아닌지 모르겠구나. 어쩌지?”
“폐렴이요? 이런 갓난아기도 폐렴에 걸려요, 어머니?”
옥순이는 별스레 신기해했다.
어딘지 모자라게 느껴지는 말투였다.
무리가 아닌 것이 그녀는 이제 겨우 열다섯의 소녀였기 때문이다.
“오늘 밤만 잘 넘겨주면 좋겠는데. 옥순아, 수고스럽지만 우물에서 물 좀 떠오렴. 그리고 수건도 가져다 다오.”
남자들 틈에서 자란 옥순은 다분히 머슴애 같은 기질이 많았다.
왔다 갔다 하며 부산을 떨었다.
갓난아기의 손발은 마치 원숭이의 그것처럼 작고 가늘었다.
영양실조였다.
울 기력조차 없어 보여 보는 사람을 더욱 안쓰럽게 했다.
태어난 지 며칠 안 된 작은 생명은 이튿날 새벽, 어머니가 밤새워 간호한 보람도 없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름도 없었다. 자신을 낳아준 엄마의 품속에서 마음껏 젖을 빨며 잠들고 싶었을 텐데….
엄마의 사랑을 단 하루도 받아보지 못한 가련한 아기였다.
제대로 울어보지도 못하고 소리 없이 하늘나라로 떠나버린 것이다.
어머니는 아가의 옷을 벗겨 몸을 닦아낸 후 흰 천으로 조심스럽게 감싸서 자신의 방에 눕혀놓고 하룻밤을 지냈다.
“어머니, 죽은 아기와 함께 자는 게 무섭지 않으세요?”
나는 호흡을 멈춘 생물에 알지 못할 공포를 느끼던 터라 시체 옆에서 주무시는 어머니에게 희미한 비난의 뜻을 담아 물었다.
“죽은 아기가 왜 무섭니? 무섭지 않단다. 엄마는 하룻밤이라도 아기 곁에 함께 있어 주고 싶어 그러는 거야.”
어머니는 이미 거무스름하게 굳어진 아기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산 사람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아가, 이 세상에서 제일 험한 것만 보고 하늘나라에 가는구나. 하지만 이 세상에는 그런 험한 세상만 있는 건 아니란다. 따뜻한 인정과 사랑이 넘치는 아름다운 세상도 있단다. 엄마 젖도 한번 먹어보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간 불쌍한 아가야. 오늘 밤만이라도 편히 잠들 거라.”
가엾은 아기의 시체는 어머니에게 용단을 내리게 했다.
어머니는 김 주사의 요청대로 대리 원장을 수락하여 기아로부터 어린 고아들을 지켜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튿날 어머니는 교회의 사 목사님을 찾아뵈었다.
“부인, 안심하십시오. 다행히 시청엔 친구가 많으니 제가 부탁하면 들어줄 겁니다.”
사 목사의 자신 있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다소 마음이 놓였다.
“저는 목사님만 믿고 있겠습니다.”
“암요. 우린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가 아닙니까? 또 윤 원장은 제 선배님이시니 그 정도의 심부름은 마땅히 해 드려야죠. 그렇지 않습니까. 부인?”
이렇게 고마운 일이 어디 있을까? 어머니는 감격했다. 마음속으로 남편에게 말하고 있었다.
“여보. 이젠 됐어요. 사 목사님이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시기로 했으니 당신의 공생원은 이제 훌륭하게 재기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어머니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