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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학자공생재단

한 알의 열매, 세상의 숲으로 서다

 

 

1.

오늘 학교에서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에 대해 발표를 했습니다.

제가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사람은 저희 할아버지입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을 잃고 고아가 되셨던 할아버지는 열심히 노력해서 버신 돈으로 어려운 이웃들을 도우시고, 훌륭한 일을 많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발표가 끝나자 선생님께서 할아버지가 아주 훌륭한 분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친구들이 훌륭한 할아버지가 계신 것을 아주 부러워해서 저도 모르게 으쓱해지며 기분이 아주 좋았습니다.

오늘 발표한 걸 할아버지께 꼭 말씀드려야지!”

나는 마음속으로 결심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나는 바람같이 달려 할아버지 댁으로 갔습니다.

오늘도 정원에서 가장 아끼시는 나무를 손질하고 계시던 할아버지는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겨주셨습니다.

할아버지, 왜 항상 이 나무를 보고 계세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나무를 가장 아끼시는 이유가 너무 궁금해 불쑥 할아버지께 여쭤보았습니다.

이 나무를 볼 때마다 우리 어머니 생각이 난단다.”

할아버지는 초록빛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나무를 바라보시며 그리운 듯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분명, 할아버지는 아주 어릴 적에 부모님을 모두 잃고 힘들게 사셨다고 들었거든요.

 

할아버지는 늘 품속에 지니고 다니신 빛바랜 흑백 사진을 꺼내 펼치셨습니다.

수많은 까까머리 아이들과 함께 찍힌 사진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할아버지는 사진 속 여성을 가리키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분이 우리 어머니란다. 우리 어머니는 거지대장이라 불린 가난한 조선인과 결혼한 일본인이셨단다.”

할아버지는 조용히 어머니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2. 할아버지의 이야기

 

우리 어머니는 일본에서 나고 자란 일본인이었단다. 당시는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고 조선의 땅과 말, 글을 빼앗던 일제강점기 시기였지.

어머니의 아버지는 조선을 통치하는 조선총독부의 관리로 가족들과 함께 조선으로 오게 되었지. 7살에 조선에 온 어머니는 목포에서 부족함 없이 풍족하게 자라셨단다. 신식 교육을 받으며 엘리트 여성으로 자라난 어머니는 음악 교사가 되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셨어.

어느 날 스승님이었던 다카오 선생님이 찾아와 한 가지 부탁을 하셨단다.

고아들이 모여 생활하는 공생원이란 곳에 가서 아이들의 얼굴에 웃음을 찾아주는, 보람 있는 일을 해 보지 않겠냐는 부탁이었지.

당시는 일본의 폭정으로 많은 조선인들이 고통받고 있을 때였지. 부모를 잃은 아이, 먹고 살기 힘들어 버려진 아이들이 아주 많았어. 어머니는 기독교인으로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조선인에게 속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공생원 아이들의 음악수업을 하기 시작하셨어.

그 당시 고아들이 모여 살던 공생원은 아주 어려운 형편이었어. 아버지 윤치호 전도사님이 7명의 고아들을 거두어 시작된 공생원은 살 집도, 먹을 것도 없는 상황이었단다. 직접 나무를 베어다 집을 지으며 고아들을 키우셨어. 고아들이 먹을 것이 없을 때는 직접 구걸하기도 하셨단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아버지를 거지대장이라고 불렀지.

어려운 형편의 공생원 아이들에게 웃음을 찾아주기 위해, 어머니는 정말 열심히, 즐겁게 봉사활동을 하셨단다.

 

3. 거지대장의 부인

 

열심히 봉사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어머니께 청혼을 결심했어. 어머니께서도 헌신적으로 고아를 돌보는 아버지를 좋아하셨지만, 청혼을 받은 후에는 망설이셨단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 일본인이 조선인과 결혼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었지. 조선을 점령한 일본사람들은 식민지인 조선에 사는 사람들을 꺼려했단다. 주변에서도 심한 반대를 했었기에 어머니는 더욱 고민이 많으셨단다. 그때, 신앙심이 깊은 외할머니께서 어머니에게 결혼을 권유하셨단다. 결혼은 인간과 인간이 하는 것이라고. 일본사람도, 한국 사람도 천국에는 구분이 없이 모두 형제자매라고.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결혼을 결심하셨고, 곧 아버지와 결혼을 하게 되셨지. 마을 사람들은 어머니를 거지대장의 일본인 부인이라고 불렀어.

아버지와 결혼하자마자 어머니에게는 수많은 자식들이 생겼단다. 어머니는 아이들을 공생원의 고아들을 가엾게 여겨 아주 열심히 돌보셨지. 그렇지만,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어머니를 썩 좋게 보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단다.

 

4. 일본인이어도 우리들의 어머니입니다!

 

1945,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배하며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게 되었단다. 해방되자 조선 땅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은 모두 일본으로 돌아갔지. 하지만 어머니는 할머니를 일본에 모셔다드린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셨단다. 공생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평생의 사명이기에, 그리고 사랑하는 아버지와 공생원의 수많은 자식들을 두고 떠날 수 없으셨기 때문이었지.

해방 후에도 어려움이 계속되었어. 어머니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힘든 일을 겪으셨지. 아버지는 일본인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친일파라며 고역을 치르셨단다.

어느 날은 우리의 원수인 일본인을 없애버리겠다며, 마을 사람들이 공생원으로 몰려왔어. 마을 사람들이 어머니를 끌어내 잡아가려고 하자, 공생원 아이들이 모두 뛰쳐나와 마을 사람들에게 매달렸어.

일본사람이어도 우리들의 어머니라며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눈물을 흘렸지. 그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은 크게 감동하여 그대로 돌아갔단다. 그러자 어머니는, '지금 살아 있는 이 목숨은 너희들이 살려준 것이다. 진실이란 국가와 민족이 달라도 통한다.'라며 공생원 아이들을 안고 눈물을 흘리셨지.

 

5. 6.25 전쟁이 가져온 비극

 

얼마 지나지 않아 6.25 전쟁이 일어났어. 6·25전쟁이 되자 북한에서 인민군들이 내려와 목포를 차지했지. 북한에서 내려온 인민군들은 인민재판이라는 재판을 열어 아버지를 사형시키려 했단다. 그러나 이번에는 마을 사람들이 나섰어. 좋은 일을 하신 분을 사형시킬 수 없다며 마을 사람들이 반대했지. 그래서 인민군은 아버지를 인민위원장에 임명하고 인민군의 일을 맡도록 했단다.

고아들을 두고 피난을 갈 수 없던 아버지는 공생원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없이 인민위원장을 맡을 수밖에 없었어. 인민군이 물러난 이후에는 국군이 공생원을 찾아왔단다. 국군은 인민위원장을 지낸 아버지를 공산주의자라며 옥에 가두셨지. 피난 갔던 목사님들이 돌아와 아버지가 기독교인이며, 고아들을 두고 피난 갈 수 없어 할 수 없이 인민위원장을 맡은 것이라고 진정서를 넣고 나서야 3개월 만에 석방되셨단다.

 

하지만 어려움이 끝난 건 아니었단다. 전쟁으로 인해 고아들은 더욱 많아졌고, 공생원의 아이들을 점점 늘어나 500명에 가까운 아이들이 살게 되었지. 고아들이 많아지다 보니 식량이 부족했고, 지금 우리가 방송이나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처럼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갔어. 어머니는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아이 곁에서 밤을 보내시며 슬퍼하셨단다. 세상에 태어나 부모의 사랑도 못 받고 가는 것이 불쌍하다며, 하룻밤이라도 곁에 있어 주고 싶다고 하셨지. 500여 명이나 되어서 아이들을 일일이 다 사랑해 주지 못하는 것을 어머니는 항상 미안해하셨단다.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차마 볼 수 없던 아버지는 고아들의 식량을 구하기 위해 광주로 떠나셨어. 그렇게 광주시청으로 떠나신 후 다시는 아버지를 볼 수 없었지. 어머니는 행방불명이 되신 아버지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알아보셨지만, 아버지의 소식조차 들을 수가 없었단다.

아버지가 행방불명되자 주위 사람들이 어머니를 찾아와 '남편도 없고 전쟁통에 혼자 살기도 어려우니 공생원을 포기하고 일본으로 들어가라'라고 했지. 하지만 어머니는 공생원을 떠나실 수가 없으셨다구나. 언젠가 아버지가 돌아오실 것 이라고 믿으셨고, 아버지가 돌아오셨을 때 자신이 없으면 실망하실 거라고 생각하셨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오셔서 수고했다는 한마디를 해주시길 계속해서 기다리셨어.

 

6. 일본인 엄마, 한국인 아이들을 키우다

 

아버지를 기다리며 혼자가 된 어머니는 어려운 상황과 조건 가운데에서도 고아들을 최선을 다해 돌보셨단다. 그렇지만 상황은 점점 더 힘들어졌지. 전쟁을 겪으며 다들 어려운 시기를 보냈기에 도움의 손길들도 점차 줄어들었어.

도움의 손길이 줄자 어머니는 가지고 계신 오르간과 결혼 때 가져온 아끼던 기모노 등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모두 내다 팔기 시작했지. 물건들을 팔아 식량으로 바꾸어 공생원의 아이들을 먹이며 공생원을 운영하셨어.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먹일 것이 없으면 죽이라도 먹이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어떤 일이든 열심히 하셨단다. 아픈 아이가 있을 때는 아이를 업고 병원으로 가 '아이를 살려 달라'고 애원하시기도 했지. 무엇보다도 아이들을 위해 늘 진심 어린 기도를 하셨어.

그렇게 어머니는 혼자 온갖 고난을 겪으시며 3000명의 아이들을 키워내셨단다.

 

7. 희생과 헌신의 사랑, 한국 고아의 어머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이들을 위해 참고, 견뎌온 시간들과 어머니의 노력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단다.

1963년에는 우리나라 대통령으로부터 문화훈장 국민장을, 1967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으셨지. 당시 우리나라를 빼앗았던 일본에 대한 불신과 편견이 가득했던 분위기에서 한국 독립 이후 외국인 여성으로, 그것도 일본인으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단다.

나라에서 주는 훈장보다도 가장 기뻤던 것은 목포시의 시민들이 자랑스러운 목포 시민상을 어머니가 받아야 한다고 했을 때였어. 나라와 민족을 넘어선 어머니의 사랑과 헌신에 목포시민들 모두가 진심으로 감동받았다는 사실이 가장 기뻤단다.

 

상을 받으신 이후에도 어머니는 여전히 공생원 아이들을 위해 사셨어.

공생원 아이들이 잘 자라 사회에 나가는 것이 어머니에겐 그 어떤 상보다 큰 상이자 기쁨이라고 하시며, 밤낮없이 공생원 아이들을 위해 일하시던 어머니는 그만 과로로 쓰러져 병상에 눕게 되셨단다.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시게 되자 공생원의 아이들뿐 아니라 수많은 목포의 시민들은 모두 슬픔에 빠졌지.

최초로 목포시민의 장으로 장례를 치르면서 모두 목포의 시민들, 전 국민들, 일본인들 모두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께 감사와 존경을 표했단다.

 

8.

 

이야기를 잠시 멈춘 할아버지의 주름진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습니다.

평생 고생만 하며 사시던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 병상에서 가장 먹고 싶어 하셨던 음식이 매실장아찌였지. 그래서인지 이 매실나무를 볼 때마다 늘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이 난단다.”

한참 말없이 나무를 바라보시던 할아버지가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머니는 한 알의 열매 같은 분이셨단다. 이 초록빛 열매가 땅에 떨어져 썩은 뒤, 씨앗에서 싹이 트고 큰 나무로 자라났듯, 어머니의 삶을 통해 나와, 다른 수많은 아이들이 싹트고 무성한 나무로 자라났단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한 알의 열매가 되어 새로운 나무들을 키워내야 할 때란다. 그리고 머지않아 너도 자라서 이 열매 같은 사람이 될 테지.”

할아버지는 조용히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나무를 올려다보니 싱그럽게 반짝이는 초록빛 열매가 보였습니다.

열매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아직은 알쏭달쏭해서 잘은 모르겠지만,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어쩐지 알 것만 같았습니다.

아마도 우리 할아버지처럼, 그리고 할아버지의 어머니처럼 사는 걸 말씀하시는 거겠지요.

 

늘 할아버지께서 하셨던 말씀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한 알의 작은 열매가 땅에 떨어져 썩으면 그 열매에서 싹이 터 나무로 자라나고, 꽃이 피고, 무성한 열매를 맺는단다. 그렇게 이 세상이 울창한 숲이 되는 것이 나의 평생의 소원이란다.'

조용히 나무를 올려다보며 눈을 감았습니다. 푸르른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이 마치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할머니의 손길처럼 따스하게 만져 주었습니다.

 

한 알의 작은 열매로 이 땅의 무성한 나무들을 키워낸 한국 고아들의 어머니

윤학자(다우치 치즈코, 1912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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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자 인터뷰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읽는 걸 좋아하고, 언젠가 읽고 싶은 글을 쓰고 싶은 평범한 30대직장인입니다.

 

 

수상소감 한마디를 부탁드립니다.

생각지도 못하게 수상을 하게 되어 기쁘고, 당선작으로 뽑아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평소 고아나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이 있으셨나요?

. 평소 고아나 소외된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많아 정기적으로 후원을 하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부분뿐 아니라 마음까지 전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전부터 윤학자 여사에 관해 알고 계셨나요? 혹은 윤학자 여사에 대한 본인의 생각이나 느낌은 어떤가요?

공생원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윤학자 여사에 대해서는 사실 자세히 알지 못했습니다. 이번 공모전을 통해서 윤학자 여사의 삶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었는데,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사명을 위해 평생을 살아가신 모습이, 삶으로 보인 모습이 참 위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변을 돌아보고 묵묵히 도우며 삶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윤학자 여사와 같은 분이야 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