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쓴이
  • 윤학자공생재단

매화꽃을 바라보며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공생원의 매화꽃은 그 옛날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울던 나를 에워싸고 위로해주던 아이들의 얼굴 같군요. 다시 봄이네요. 공생원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매화 꽃잎을 보고 있으니 이른 봄 같은 어릴 때의 기억부터 하나둘씩 피어납니다.

 

내가 조선에 온 건 7살 때였습니다. 고향 고치에 살다 관료 일을 하시던 아버지를 따라 목포에 오게 되었는데 어린 나이에 일본과 다른 조선의 풍경은 신기함이었답니다. 커다란 갓을 쓰고 긴 곰방대를 문 할아버지들. 기모노와는 전혀 다른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자들. 제 몸보다 큰 지게를 진 아이들.

 

17살에 만났던 나의 영어 선생님이었던 다카오 마쓰타로 선생님과 그분의 부인도 떠오릅니다. 다카오 선생님은 영국의 에든버러 대학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신사였고, 오르간 연주를 멋지게 하던 선생님의 부인도 저를 참 예뻐해 주셨답니다. 나는 선생님의 부인에게 3년간 오르간을 배웠지요. 그리고 그 인연으로 정명여학교의 음악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오르간을 치며 학생들과 노래를 할 때가 참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지요. 나는 갑작스러운 슬픔에 좌절했지만, 의학을 배운 어머니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며 조산원을 차리고 살아갈 힘을 내셨습니다. 또 어릴 때부터 허약했던 나는 병을 얻었습니다. 수술과 치료 후 완쾌했지만, 어머니에게 아이를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24살에 공생원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카오 선생님이 보람 있는 일을 해보지 않겠냐.’며 음악 선생님을 구하던 윤치호 전도사를 소개해주었고 그렇게 나는 공생원 아이들의 음악수업을 맡게 되었지요. 평소엔 힘들어해도 노래를 부를 때면 웃는 아이들의 모습이 참 좋았고 아이들이 사랑스러웠답니다. 나도 아이들과 노래를 부를 때면 웃게 되었지요.

 

윤치호 전도사는 사회를 위해 베풀고 보람 있는 인생을 살고 싶다며, 절실한 기도로써 선교사로 공부하며 나사렛 목공소 일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럴 때 부모 잃은 7명의 아이들이 다리 밑에서 사는 것을 보고 공생원을 만들고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살게 된 것이 공생원의 시작입니다. 남들에겐 거지대장으로 불렸지만, 예수님의 사랑뿐이던 사람.

 

26살에 윤치호 전도사가 내게 저 아이들을 위해 우리가 저 아이들의 부모가 되어주자며 우리 결혼하자.“며 청혼을 해왔습니다. 나는 일본사람이었고 윤치호 전도사는 조선 사람인데다 앞으로의 인생에 험난한 길이 열릴 것이라며 주위 사람들은 모두가 결혼에 반대했습니다. 윤치호 전도사를 사랑하는 마음은 컸고, 공생원 아이들 또한 사랑했지만, 일본인과 한국인의

결혼은 그 시절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내 어머니가 결혼은 나라와 나라가 하는 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하는 것이다. 하늘 나라에선 일본인도 조선인도 다 같은 형제다.”라고 하시며 결혼을 축복하셨습니다. 윤치호 전도사에겐 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 했더니 수많은 우리 아이들이 있는데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냐며 했고, 100명이 넘는 공생원 아이들이 축복해 부부가 되었습니다. 또 그때부터 내 이름은 다우치 치즈코에서 윤치호 전도사의 성을 따라 윤학자가 되었습니다.

 

결혼 후엔 아이를 갖게 해달라는 나와 윤치호 전도사의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셔서 아이들이 태어났습니다. 나는 내 아들, 딸이었지만 그 아이들을 여러 공생원 아이들과 함께 지내게 하며 똑같이 입히고 먹이고 재웠습니다. 내 아이가 다른 아이들에게 일본인이라 놀림당하고 따돌림당할 땐 가슴이 아팠지만 다른 아이들을 위해 참아야 했습니다. 내 아이가 잠든 후에야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에 바라보면서, 눈물을 참으며 슬퍼했지요.

 

35살 때 조선은 일본에게서 해방을 맞이했고 나라 이름도 대한민국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엔 광복의 기쁨이 가득했지만, 목포의 일본인들은 서둘러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타고 떠났습니다. 전쟁에서 진 일본인들에게 돌아올 위험과 따돌림을 모르진 않았지만, 공생원 100여 명의 아이들의 어머니로서, 내가 태어난 일본이란 나라보다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한 존재는 대한민국, 목포, 그리고 공생원의 아이들이었습니다.

 

생각한 대로 일본인인 나와 남편 윤치호 전도사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시달려야 했습니다.

일제시대엔 일본사람들에게 독립운동을 한다며, 미국 선교사들과 지낸다고 시달렸는데 해방 후, 내겐 전쟁에 진 일본인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라.’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이어졌고 윤치호 전도사에겐 일본에 충성한 친일파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공생원의 아이들이 우리 아버지, 어머니한테 그러지 말라.’는 행동으로 손에 손을 잡고 띠를 둘러서 온몸으로 막아주어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마치 언덕에 띠를 둘러 활짝 핀 매화꽃처럼, 나와 남편을 위해 활짝 꽃을 피워 준 공생원의 내 아이들.

 

40살 때, 한국전쟁이 터졌습니다. 순식간에 목포까지 북한군이 내려와 목사님들과 경찰관, 공무원들을 붙들어 갔습니다. 나와 남편인 윤치호 전도사도 북한군에게 인민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북한군들은 남편에게 나의 죄를 말하라고 시켰고 나에겐 남편의 죄를 말해야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모인 목포시민들과 공생원 아이들이 나와 남편은 공생원을 위해 미국인 선교사들과 가까이 지냈고 부인은 일본사람이긴 하지만, ‘미국의 편도, 일본의 편도 아닌 부모 잃은 아이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좋은 분들이라고 목숨을 걸고 강하게 지켜주어 살 수 있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한군이 물러나고 국군이 목포로 들어왔지만, 이번엔 남편은 국군에게 북한군 편을 들었다고 잡혀갔습니다. 목포의 목사님들과 남편을 알던 군인이 윤치호 전도사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국군에게 알려 석 달 만에 풀려났지만 며칠 만에 다시, 남편은 공생원 아이들이 먹을 식량을 도움 받기 위해, 광주도청으로 도움을 구하러 떠났다가 그 길로 연락이 끊기고 실종되었습니다.

 

남편 윤치호 전도사가 국군에게 잡혀가서 갇혀있을 때, 큰아들이 구두를 닦은 돈으로 친구와 함께 단팥빵을 사서 윤치호 전도사를 만나러 갔더니 나는 괜찮다. 가지고 가서 같이 나눠 먹어라.’라고 큰아들에게 말을 했던 것이 윤치호 전도사의 마지막 말이 되었습니다.

 

41살이 되자 홀로 공생원을 이끌어 가야 했습니다. 100명 정도였던 아이들은 전쟁이 일어나며 부모를 잃은 아이들로 300명을 넘었고 농사로는 턱없이 부족해, 그 많은 아이들이 먹을 것들을 마련하기 위해, 나는 리어카를 끌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아끼던 옷들과 오르간도 팔았습니다. 나는 밤마다 눈물이 앞섰지만 공생원의 아이들을 위해, 또 돌아올 남편을 위해 힘을 내야 했고 울 수 없었습니다.

 

하루는 병으로 생명이 희미한 아기가 공생원으로 왔습니다. 살려낼 수가 없었습니다. 오자마자 곧 천국으로 떠나버린 아기. 아기에게 엄마가 되어 하루를 주고 싶었습니다. 이르게 천국으로 떠난 아기를 위해 깨끗한 새 옷을 입히고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43, 한국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실종된 남편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고 공생원의 아이들과 내 자식인 아들 둘, 딸 둘도 모두 씩씩하게 맡아야 했습니다. 나는 겉모습과 마음속까지 모두 한국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얀 한복 저고리에 검은색 한복 치마를 항상 입었고, 일본어 대신 한국어,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목포의 어머니로 살아야 했습니다. 일본 음식이 그리웠지만 찾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 무렵엔 남편이 돌아오는 꿈을 자주 꾸었습니다. 활짝 웃는 얼굴로 돌아온 남편이 나 없는 동안 고생했지?’ 하면서 토닥여주는 따뜻한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꿈에서 깨면 남편은 없었고, 슬퍼할 틈도 없이, 남편의 꿈을 꼭 이루어 공생원을 아이들 모두에게 더욱 따뜻한 곳으로 또 아이들의 교육과 미래도 이끌어 줄 수 있는 든든한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결심으로 이른 하루를 부지런하게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럴 때, 또 다른 나의 고민은 내가 일본인이어서 공생원의 대표는 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의 친구인 목사님에게 대표를 맡겼지만, 나를 공생원에서 몰아내려 했고 공생원을 부모 잃은 아이들의 보금자리가 아닌 사업으로 생각하는 목사님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말로 다 못할 어려움 끝에 나는 그럼에도 공생원을 지켜내었습니다.

 

여전히 대한민국과 일본의 관계는 좋아지지 않았고 또 여전히 나는,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닌 중간에 있어 서러움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활짝 피어나는 봄날의 꽃밭인 공생원을 생각하며 시련을 이겨내었습니다. 아니 세찬 바람에 일렁이는 꽃더미 같은 아이들을 위해서 꼭 이겨내야만 했습니다. 공생원에 살았던, 살고 있는 나의, 우리의 3000명의 꽃더미를 위하여.

 

46살 때, 공생복지재단이 만들어짐에, 아이들의 복지와 교육에도 더 도움을 줄 수 있는 튼튼한 힘을 쓸 수 있겠다 싶은 마음에 나는 참으로 기뻤습니다. 어느새 커버린 큰아들도 공생원 운영에 힘을 다 쏟겠다며 사회복지 공부를 마치고 나를 힘껏, 열심히 도왔습니다. 공생원의 아이들과 함께 평등하게 키웠지만 특별하게 잘 자라준 큰아들이 참 기특했습니다.

 

내 나이 53,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았습니다. 비로소 한국인이 되었다 싶었습니다. 일본인 다우치 치즈코는 이제 영혼까지 한국인인 윤학자로서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목포 시민상과 국민이 주는 희망의 상도 이어졌습니다. 모두 외국인에게, 일본인에게 처음 주는 상이었습니다. 너무나 힘겨웠던 지난날이 지나가고 남편이 더 그리웠습니다.

 

하지만 건강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공생원을 위해 쉼 없이 달려온 피로탓이라 여겼지만 쉽게 회복되지 않는 건강에 염려가 크게 생겼습니다. 그래도 큰아들과 일본을 오고 가며 공생원의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일본인들이 참여하는 후원회도 만들었고 일본인들의 관심도 이어졌습니다. 내 건강보다는 공생원 아이들의 행복이 여전히 더 소중했습니다.

 

57살이 되었을 때 병을 알았습니다. 스스로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며 병을 알고도 일에 열심이었지만 병마에 쓰러졌습니다. 서울에서의 1년간 병원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다시 공생원에 돌아왔을 때에는 천국이 가깝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머니가 그리웠습니다. 아이들 한명 한명이 내 손을 잡아주고 인사를 했습니다. 3000여 명의 자식을 둔 어머니인 나에게 이 세상과의 이별이 찾아왔습니다. 마음으로 3000번의 작별인사를 거듭 보냈습니다.

 

천국이 가까웠을 때, 어머니가 내 앞으로 보였습니다. 나를 따뜻하게 꼬옥 안으셨습니다. ‘우메보시가 타베타이.(매실장아찌가 먹고 싶다.)’ 일본어로 내 어머니에게 속삭였습니다. 아이 때에 어머니와 보냈던 시절이 그리웠고 홀로 일본에 두고 떠나왔던 어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에 눈물이 났습니다. 한국어만 쓸 수밖에 없었던 나 윤학자였기에 더욱 모든 것을 이해해 준 내 어머니에게 고마움과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58살 생일에 나는 하나님 품에 안겼습니다. 공생원의 아이들을 위해 음악을 가르치고, 노래를 부르고, 아이들의 먹을 것을 위해 농사를 짓고 하루종일 리어카를 끌고 먹을 것을 찾아다녔던 삶,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지내며 고통이 많았던 인생, 공생원에 살았던 3000명 아이들의 어머니로 살았던 일생, 끝내 돌아오지 못한 남편 윤치호 전도사에 대한 그리움으로 보냈던 날들이었습니다.

 

3만여 명의 목포시민들이 나의 천국으로 가는 길을 배웅해주었고 일본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내 삶을 기억해주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내 고향 고치에는 목포에서 가져간 자갈 3000개를 기념비 아래 깔아 나를 영원히 기억하고, 공생원에는 내가 좋아하던 매화나무가 20그루가 심어졌습니다. ‘윤치호 윤학자 기념관엔 나의 추억이 가득합니다. 사랑의 묵시록이란 아름다운 영화도 대한민국과 일본이 힘을 모아 만들어 주었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한참 보고 있었던 매화나무들, 공생원 아이들이 매화나무가 있는 곳으로 뛰어옵니다. 따스한 봄바람을 보내어 매화꽃을 흔들어 반가운 손 인사를 해야겠습니다. 이제는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있는, 윤치호 전도사와 공생원을 웃으면서 지켜보겠습니다. 그리고 기도로 지켜주겠습니다. 공생원 아이들의 건강과 행복과 미래까지 모두 말이지요.

 

공생원의 어머니내 이야기를 마치며 공생원 아이들에게 그리고 이 글을 읽어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한 줄을 보냅니다.

 

내가 주릴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헐벗었을 때 옷을 입혔고,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마태복음 25:3540)

 

 

 

====================
 

수상자 인터뷰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오래전에 동시집 우리 둘이가위바위보를 펴내었던 김현이라고 합니다. 윤학자 여사님 공모전 덕분에 대학 졸업 이후로 정말 간만에 동화를 쓸 수 있었습니다.

 

 

수상소감 한마디를 부탁드립니다.

무엇보다 제가 30년차 개신교 신자인 까닭에 은혜로운 상이라 더 감사드리는 마음이고 영광입니다.

 

 

평소 고아나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이 있으셨나요?

. 지금은 인연이 끊어졌지만 평택의 한 복지시설과 교류를 하고 지냈고 그곳의 학생의 편지도 계속 받았는데 새삼 궁금한 마음이 듭니다.

 

 

전부터 윤학자 여사에 관해 알고 계셨나요? 혹은 윤학자 여사에 대한 본인의 생각이나 느낌은 어떤가요?

목포에 여행 갔다가 공생원을 들른 적이 있어서 윤학자 여사님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윤학자 여사님께선 평생을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신 진정한 聖子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동화를 쓰면서 윤학자 여사님의 고귀한 일생을 가슴 깊이 알 수 있어서 진심 은혜로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