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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고아의날

 6·25 동란으로 급격히 발생한 전쟁고아를 위해 세계 각국에서 원조의 손길을 뻗쳐왔다.

 

 거지 대장 시절에는 없던 외국의 원조가 시작되자 곳곳에서 고아원이 생겨나 목포 시내만도 7, 8군데가 신설되었다.

 

 그 무렵 우리 원생 전원은 양친 결연 사업을 벌이는 기독교 아동 복리회의 권유로 독사진을 한 장씩 미국에 찍어 보냈었다.

 

 들은 바에 의하면 크리스마스 때는 선물을 보내주기도 하고, 학비도 원조해 준다고 했다.

 

 나는 아동 번호 1번으로 사진을 찍었다. 물론 누님과 동생들도 찍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다 건너 미국 땅에서 생일 축하 선물이 날아왔다.

 

 내 이름으로 된 최초의 우편물이었다.

 

 어떤 물건이 나올지 사뭇 가슴이 두근거렸다.

 

 만나본 적도 없는 나에게 대체 누가 이런 선물을 보냈을까?

 

 전에 찍은 내 사진을 받은 후원자가 선물을 보낸 것이다.

 

 “먹을 게 들었음 좋겠다.”

 

 내 또래의 인철이가 말했다.

 

 “난 운동화가 들었음 좋겠다. 축구하기 편할 거 아니야?”

 

 석오의 말이었다.

 

 나는 내 앞으로 부쳐온 소포를 손에 들고 보니 왠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 후원자는 어떤 사람일까? 혹시 잘못 온 게 아닐까?

 

 석오가 자꾸 재촉하는 바람에 마지 못해 소포를 열었다.

 

 사진이 한 장 눈에 띄었다.

 

 키가 크고 우아한 복장을 한 부인의 사진이었다.

 

 ‘미세스 메이호그. 이분이 무엇 때문에 내 후원자가 되어야 해? 난 어머니가 계시잖아?’라는 생각이 들자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복잡한 의구심이 솟구쳐 올랐다.

 

 그러나 그보다 소포 안의 내용물에 더욱 흥미가 끌린 나는 편지를 펼쳐보았다.

 

 [미국의 아동 복리회에서 윤기 군을 소개받았습니다. 반갑습니다. 한국 동란 때문에 한국에는 윤기 군과 같은 처지의 아동들이 많다는 얘길 듣고 저는 윤기 군을 나의 사랑하는 아들로 맞이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미국과 한국에 떨어져 살고 있지만, 이제부턴 한 가족입니다.]

 

 본 적도 없는 서양 여성이 내 가족이라니, 나는 웃음이 나왔다.

 

 [요즘 저는 식사 때나 취침 전에 한국의 아들을 생각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대해, 그리고 윤기 군 주변 친구들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윤기 군의 생활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탁구 세트를 동봉하니 친구들과 사이좋게 놀기 바랍니다. 나의 사랑하는 윤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셀룰로스 공과 라켓이 마음에 들었다.

 

 처음엔 옥외에서 공 던지기를 하며 놀았으나 곧 그것이 탁구공과 라켓임을 알았다.

 

 나는 메이호그 여사의 선물을 학교에 가지고 가 친구들과 게임을 즐겼다.

 

 이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다.

 

 그렇게 싫던 학교가 이제는 매력적인 장소로 바뀌었다.

 

 왠지 모르게 세상일까지 재미있어졌다.

 

 탁구 실력도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원아들과 공생원 일에만 열중하셨다. 내겐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래 내게는 관심도 없단 말이지. 좋아, 상관없어. 난 내 힘으로 살아갈 테니까. 어머니 도움 따윈 없어도 좋단 말이야.”

 

 후원자 메이호그 여사가 보내준 라켓과 탁구공은 내게 큰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끊임없이 어머니께 반항과 의지를 반복해 온 나에게 메이호그 여사가 보내준 선물인 탁구 라켓은 그 후 내 인생을 새롭게 바꿔주었다.

 

 결국, 나는 탁구 체육 특기생으로 광주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하지만 내 기대와는 다르게 정작 탁구부에서 한 일이란 공 줍는 일과 청소뿐이었다.

 

 라켓 한번 제대로 잡아볼 기회가 허락되지 않았다.

 

 다 집어치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기다리다 보면 반드시 기회가 올 것이라고 자신을 달래며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목포에서는 탁구에 재능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선생님들과 전교생의 이목을 끌고 칭찬을 받았으나 여기선 탁구부원 외에는 아무도 탁구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쉬는 시간에도 책을 읽으며 공부하곤 했다.

 

 나는 정말 재미없는 녀석들이라고 생각했다.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양옆 자리의 친구가 서울대가 어떻고, 농과대, 공대가 어떻다며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가운데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탁구 이야기라면 끼었겠지만, 공부 이야기라니….

 

 바다에 관해서라면 내가 나서서 중재해 줄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그저 같은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서울대!”

 

 “서울대!”

 

 그들의 입에선 이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너희들 서울대, 서울대 하며 떠드는데 대체 서울대가 뭐냐?”

 

 두 사람 모두 눈을 크게 떴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정말 진심으로 묻는 말이었다.

 

 나는 그때 서울대란 이름을 처음 들었다.

 

 그들의 설명을 듣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큰 세계가 바로 가까이에 있음을 깨달았다.

 

 더욱이 그들은 모두 인생의 확고한 목표를 설정하고 자신이 나아갈 길을 결정하고 있었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탁구밖에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장차 무엇이 된단 말인가?

 

 나는 왜 이제껏 서울대도 모르고 있었는가?

 

 어머니는 어째서 내게 대학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까?

 

 범치 형도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었다.

 

 공생원은 내게 있어 그저 놀이 천국에 지나지 않았던 걸까?

 

 그날부터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 * *

 

 고등학교 3학년으로 진급했다.

 

 의사 아들 김동선은 의과 대학에 진학해 슈바이처가 되겠다고 한다.

 

 임동신은 서울대 조선 공학과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그 길만이 자립의 지름길이라고 말한다.

 

 나는 방황했다.

 

 주변에선 다들 신학교에 가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목사님이 되고 싶지 않았다. 어렸을 적의 경험 때문에 어쩐지 그들이 위선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만인에게 겸손하라, 솔직하라,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라고 설교하면서 정작 자신은 솔직하지도 벌거숭이가 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나는 공생원의 옛 직원이었고 이제 막 신학교를 졸업한 이정규 선생님을 찾아 뵙고 고민을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나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말씀을 이으셨다.

 

 “네 아버지는 정말 훌륭하셨다. 참으로 인간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었지. 요즘처럼 하나님을 내세워 허튼일을 벌이는 무리와는 근본적으로 달랐어.”

 

 이 선생님은 공생원 재직 당시 원이 두 차례나 남의 손에 넘어갈 뻔했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기야, 넌 본바탕이 되어 있는 놈이니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지역 사회 개발 분야에 한 번 도전해 봐라. 거기라면 네가 추구하는 유토피아가 있을 거다.”

 

 뜻밖이었다. 가슴이 찌릿했다.

 

 “지역 사회 개발과라니, 그런 과가 있습니까?”

 

 “있지. 있고말고.”

 

 나는 갑자기 가슴이 설렜다.

 

 그러나 어머니는 내 말에 정면으로 반대하셨다.

 

 “이 사업은 끝이 없단다. 지금 이곳에 있는 아이들이 성장하여 사회에 나가면 또 다른 아이들이 들어오지. 정말 한도 끝도 없는 사업이야. 내 생각으로 넌 너 자신의 길을 개척했으면 좋겠다. 이 사업은 아버지가 돌아오시는 날까지는 내가 지켜야 한다고 이 어미는 생각하고 있다.”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머니는 뭔가 잘못 생각하고 계신 거예요. 제가 사회사업학과를 택한 것은 이 공생원을 후계하기 위한 게 아니란 말예요. 저는 고아가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농촌으로 갈 겁니다!”

 

 어머니의 반대에 오기가 생긴 나는 더욱 입시에 힘을 기울였고 그 해 당당하게 합격했다.

 

 나는 온 세상을 얻은 듯 기쁨에 들떴다.

 

 아무리 반대하셨다고 하더라도, 장남이 대학에 합격했으니 기뻐해 주시리라 믿고 어머니께 달려갔다.

 

 그런데 막상 어머니에게 합격 통지서를 내밀며 입학 수속에 필요한 호적 등본을 떼야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말없이 울고 계셨다.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어깨를 들썩거렸다.

 

 “제가 복지를 공부하는 게 그렇게 싫으세요?”

 

 나는 까닭 없이 화가 치밀었다.

 

 “아니야.”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우시는 거예요?”

 

 어머니는 눈물 젖은 얼굴로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네 호적은 이곳에 없어.”

 

 “호적이 없다니요?”

 

 “일본인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네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었다.

 

 전신의 힘이 어디론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내가 어째서 일본인인가?’

 

 일본말도 모르고 친구도 모두 한국인뿐인데, 한국 음식만 먹고, 이 강산 밖으로 나가 본 적도 없는 내가 왜, 어째서 일본인이란 말인가? 어머니가 일본인이기 때문에? 하지만 내 아버지는 엄연히 한국인 아닌가. 그런 내가 왜 일본인이란 말인가?

 

 어머니는 애써 눈물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기야, 그건 이 어미가 무남독녀 외동딸이어서 너희 외할머님의 간청으로 아버지가 다우치(田內) 가로 입적되었기 때문이란다. 너희들이 크면 귀화하려 했지만, 정부의 허가를 받기 힘들어서…. 용서해다오.”

 

 일본말도 모르는 아들 앞에서 용서를 구하는 어머니.

 

 어머니는 죄인처럼 몸을 움츠리고 앉아 있었다.

 

 나는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았다.

 

 가슴 가득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슬픔이 교차했다.

 

 눈이 부시게 흰 저고리의 어깨선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

 

 어머니 손을 덥석 붙잡고 떨리는 음성으로 외쳤다.

 

 “어머니! 얼굴을 드세요. 제 고향은 목포예요. 제가 자란 곳은 저 유달산과 고하도 앞바답니다. 어머니, 얼굴을 드세요.”

 

 어머니는 눈물을 거두려 하지 않았다.

 

 나는 격한 감정에 참았던 눈물이 솟구쳤다.

 

 어머니의 양손을 힘주어 잡았다. 고마운 어머니.

 

 ‘저를 한국인으로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만약 제가 어렸을 때 일본인이란 사실을 말해 주셨다면 아마도 저는 일본 하늘만 쳐다보며 인생의 목표도 싹트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어머니, 저는 한국인 윤기로 살아갈 겁니다. 제 국적은 종이 서류 이상의 그 어떤 의미도 없습니다.’

 

 어머니의 손을 부여잡으며 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 * *

 

 일본에서 호적 등본이 도착하기까지 나는 초조와 불안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과연 일본에 내 호적이 있긴 있는 건가?

 

 열아홉 살이 될 때까지 일본에서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는 것도 이해가 안 가고, 또 내가 전혀 알지 못했다는 사실도 이상했다.

 

 혹 일본에도 호적이 없다면 나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국제 고아가 아닌가? 어머니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워낙 고생만 하시다 보니 노망이 드신 건가?

 

 나는 기도했다. 부디 내가 일본인이 아니기를, 분명 한국인이기를.

 

 주위 친구들의 시선도 왠지 달라진 것 같아 거리에 다니는 일마저 꺼려졌다.

 

 도무지 마음을 안정시킬 수 없었다.

 

 나는 바닷가로 나갔다. 바다를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고하도와 아득한 바다를 보고 있노라니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기랄!”

 

 중얼거렸다.

 

 “일본인이면 어떻고, 한국인이면 무슨 상관이냐. 나는 다만 한 인간일 뿐이다. 하나님의 자녀인 거야….”

 

 어느새 입학 수속 마감일이 다가왔다.

 

 나는 초조해진 나머지 어머니를 추궁했다.

 

 “뭐예요. 아직도 안 오잖아요? 역시 어머니가 거짓말을 하신 거죠? 제 말이 틀립니까? 일본에 내 호적이 있을 턱이 없어요. 언제까지 저를 속이실 작정이세요?”

 

 어머니는 잠자코 계시더니 책상 서랍 속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나는 빼앗듯 낚아채어 들여다보았다.

 

 호적 등본이었다.

 

 호주 다우치 치코(田內 致浩), 처 치즈코(千鶴子), 장녀 키요미(淸美), 장남 모토이(基), 차녀 무쿠미(睦美), 그리고 공란.

 

 다우치 모토이? 이게 나란 말인가? 나는 픽 웃었다.

 

 게다가 동생 영화는 어떻게 된 거야? 왜 빠져 있는 거지?

 

 전후(戰後) 태어난 동생은 미처 호적에 올리지 못했다는 설명이었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이따위 엉터리 호적에 제가 속을 줄 알아요? 다우치? 저는 이런 성(性) 싫습니다.”

 

 호적 등본을 내팽개치듯 버리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거리고 산길이고 발길이 가는 대로 무작정 걸었다.

 

 주위에 어둠이 내렸을 때 나는 산을 내려가 원으로 돌아왔다.

 

 범치 형이 다가왔다.

 

 나는 태연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형,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 것 같아?”

 

 “무슨 소리야? 한국인이지.”

 

 “아니야. 아니더라고….”

 

 계속 감을 잡지 못하는 범치 형을 붙들고 나는 내 신상에 관해 털어놓았다.

 

 이야기 도중 격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눈물을 쏟으며 흐느껴 울었다.

 

 나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범치 형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기야. 그래도 너는 행복한 놈이야. 나를 봐. 국적도 호적도 아무것도 없잖아. 내게는 저 다리 밑에서 나를 주워 온 원장 아버지밖에 없단 말이야….”

 

 채 말을 맺지 못하고 이번엔 형이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형의 눈물을 보는 순간 이 지구, 이 세상이란 것이 정말이지 너무나 크고 넓고 불가사의하게 느껴졌다.

 

 나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그토록 감격한 기억이 없었다.

 

 범치 형은 눈물을 그치고 그 억센 팔로 내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어머니 계신 곳으로 가자. 그리고 우리 어머니를 위로해 주는 거다. 이 세상에서 제일 외로운 분은 바로 우리 어머니란 말이야.”

 

 나는 형의 얼굴을 올려 보았다.

 

 하늘에는 조각달이 떠 있었다.

 

 쏟아지는 별빛이 내게 미소를 보내오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한 태도였다.

 

 나는 그날 밤 어머니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 어머니!”

 

 다시 한번 불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