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입학 수속이 무사히 끝났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일본인이 어째서 이 학교를 지원했냐고 교수님이 물으시면 뭐라 대답해야 하나 걱정했는데 아무 질문도 안 하셨다.
친구들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나도 차츰 나의 국적을 의식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윤기란 이름을 가진 대한민국의 아들로서 여느 젊은이와 마찬가지로 조국의 운명을 걱정하고 토로했다.
한일 관계가 험악해졌다.
대학생들이 곳곳에서 다시는 일본에 나라를 팔지 말라고 시위할 때 나 역시 동참했다.
그런 때 어머니가 사전 연락도 없이 서울의 비좁은 하숙방을 찾아왔다.
학비를 건네주고 곧 돌아가시려니 생각했는데 어머니는 내 기색을 살피며 말했다.
“기야, 오늘은 네 방에서 묵었다 가고 싶구나.”
“그렇게 하세요.”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날 밤 이불을 펴고 자리에 누웠다.
“기야.”
어머니가 나지막이 부르셨다.
“네?”
“나 말이다. 네가 어른이 된 것 같아 기쁘다.”
나는 별소리도 다 하시는구나 싶었다.
“너는 나보다 훨씬 강해 보여. 마치 네 아버지를 보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숨을 죽이고 어머니의 다음 말씀을 기다렸다.
“내가 네 나이만 했을 때 생각이 나는구나. 얘기한 적이 없지? 그러니까 내가 여학교 시절, 그땐 정말 행복했었지. 먹을 것, 입을 것,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는 생활이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는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것은 어머니 치즈코의 반생(半生)을 회고하는 이야기였다.
치즈코는 여학교 시절부터 허약한 체질이었다.
아버지가 조선 총독부 관리로 있었기 때문에 유복한 생활을 했다.
그러다 치즈코가 스무 살 되던 해 아버지가 급환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 하루(春)는 남편이 죽은 후 조산사로 일하면서 치즈코와 살아갔다.
치즈코는 여학교를 졸업한 후 3년 동안 오르간을 익혔다.
은사인 다카오(高尾) 선생의 부인이 음악 선생이었다.
두 분 다 크리스천이며 사제 간으로 인간으로서 서로 깊이 신뢰하며 지냈다.
크나큰 행운이었다.
다카오 선생은 영국 에든버러 대학에서 유학하셨으며 무척 통이 큰 분으로 폭넓은 대인 관계를 맺고 계셨다.
그런 다카오 선생이 어느 날 치즈코를 불렀다.
“치즈코 양, 보람 있는 일 해 보지 않을 텐가?”
그리고는 말씀을 계속하셨다.
“이 지방에 공생원이라는 고아원이 있지. 그곳 원장은 다리 밑에서 떨고 있는 일곱 명의 거지와 생활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수십 명의 가족으로 컸어. 헌신적인 사랑으로 돌보고 있지만, 왠지 아이들의 얼굴엔 좀처럼 웃음이 없다는구나.”
치즈코는 은사님이 무슨 말을 꺼내시려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래서 치즈코 양을 믿기에 하는 말이네만, 공생원에 가서 아이들에게 웃음을 되찾아주는 일을 해 보지 않을 텐가?”
치즈코는 망설였다.
“그 아이들은 전부가 고아거나 버려진 아이야. 모두 우리 일본이 만들어낸 과오지. 우리가 한반도에 침입해 들어와 총독부를 세우고 토지를 수탈하여 무고한 농민들이 고향을 등지고 떠날 수밖에 없게 된 것 아닌가? 그렇게 버림받은 아이들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치즈코 양이 아이들 얼굴에 다시 웃음이 돌게끔 노력해 주길 바라네. 이것이 나의 간곡한 부탁이야.”
스물여섯의 치즈코에게 있어 이 이야기는 대단히 충격적이었고 동시에 감동적이었다.
치즈코는 어머니 하루에게 그 이야기를 꺼냈다.
“음, 다카오 선생님의 말씀이라면 틀림없을 게다. 하지만….”
어머니의 동의는 치즈코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다음 주 일요일 치즈코는 공생원을 방문했다. 윤 원장은 진심으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하지만 치즈코 씨처럼 고생 모르고 자란 분이 이곳 생활을 견딜 수 있을는지요. 보시다시피 먹을 것도 제대로 없는 형편입니다.”
이미 각오는 한 바였지만 공생원은 그야말로 초라한 시설로 벽도 칸막이도 없는 10평 정도의 방 하나가 전부였다.
치즈코는 그 허술한 곳에 있기로 했다.
그날부터 음악 지도는 차치하고 아이들의 시중이 시작되었다.
4~50명의 고아들에 원장 한 사람이 매달려 돌보고 있었다.
원장은 까까머리에 밀짚모자를 쓰고, 남들은 다 구두를 신고 다니는 시대에 유독 짚신을 신고 다녔다.
그러나 그의 눈은 얼마나 맑고 깨끗했는지 한눈에 신념이 강한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첫 대면에서 치즈코는 이 청년에게 마음이 끌렸다.
세 번째 방문했을 때였다.
아이들이 말썽을 일으켰다. 도둑질하다 붙잡혀 지서에 끌려간 것이다.
아이들과 원장은 시종 우울한 얼굴이었다.
아이를 데려오려고 해도 변상할 돈이 없었다.
치즈코가 이 문제를 해결코자 나셨다. 돈을 변상하고 아이를 데려온 것이다.
이 일로 인해 좀처럼 사람을 믿으려 들지 않던 원아들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치즈코는 그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기도 하고 동화도 읽어주었다.
아이들의 굳었던 표정이 차츰 풀릴 무렵 치즈코가 공생원에서 보내는 시간은 대폭 늘어났다.
물론 보수는 없었으나 치즈코는 만족했다.
원장이 친부모같이 너무나 열심히 아이들을 보살피는 모습을 매일 옆에서 볼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치즈코는 이제 공생원에서 없어선 안 될 존재가 되었다.
그런 어느 날 윤 원장이 치즈코에게 청혼을 했다.
갑작스러운 청혼에 치즈코는 당황했다.
“시간을 주세요. 기도해 보겠습니다.”
가까스로 그렇게 대답한 치즈코는 며칠을 생각한 끝에 어머니 하루에게 털어놓았다.
어머니는 다카오 선생을 통해 이미 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넌 어떠냐?”
치즈코는 주저하면서, 그러나 명확히 대답했다.
“뭐라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그분은 사람을 끄는 힘을 가진 분이에요. 사랑하고 있어요.”
주위의 일본 사람은 두 사람의 결합에 대해 심한 거부반응을 보였다.
노골적인 험담이 치즈코의 귀에도 들어왔다.
“저 처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조센징에다 거지 대장인 작자와 결혼을 하려 들다니…. 어딘가 잘못됐나 봐. 이건 일본인의 수치다.”
그러나 어머니 하루는 그런 딸의 마음을 이해해 주었다.
“결혼은 나라와 나라가 하는 게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하는 거야. 하늘나라에선 일본인, 조선인 구별 없이 모두가 형제자매란다.”
어머니의 한마디에 치즈코는 더욱 결심을 더욱 굳혔다.
결혼이 확정되자 가깝게 지내던 일본인마저 길에서 마주쳐도 못본 체하기 일쑤였다.
차가운 시선을 받는 가운데 묵묵히 이 혼사를 추진시킨 것은 다카오 선생 내외였다.
결혼식장으로 정한 목포 공회당은 넓었다.
두 사람의 결혼에 험담을 늘어놓던 일본인들이 단순한 호기심으로 모여들었다.
목포 시내의 유지들도 구경거리라도 난 듯 떼 지어 공회당으로 몰려왔다.
진지한 쪽은 중매인인 다카오 선생 내외와 양가 가족뿐이었다.
아니 또 있었다. 식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 원아들이 일제히 기다리고 있었다.
목포 시내의 거지란 거지는 모두 모여 있었다.
“거지 대장 만세!”
“거지 대장 만세!”
환호성이 터졌다.
윤치호는 언제 준비해 두었는지 그들에게 200개의 빵을 나눠주었다.
결혼 예복도 갖추지 못한 모습이었건만….
* * *
그날부터 전기도 가스도 없는 비문화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맨발로 나다니기 예사였고 아침에 세수를 거르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돼지가 따로 없었다.
치즈코는 먼저 아이들에게 하루 세 번 규칙적으로 식사하는 습관부터 가르쳤다.
식사 예절과 손발 씻는 법도 가르쳤다.
목욕 따윈 꿈도 꾸지 못했으므로 근처 바닷물로 몸을 씻도록 했다.
밤에는 칸막이도 없는 썰렁한 방에 가마니를 깔고 새우잠을 갔다.
신혼의 달콤한 꿈 따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생각다 못해 잠자리만은 시내에 있는 친정집 신세를 졌다.
공생원의 낡은 건물은 언제 내려앉을지 몰랐다.
무엇보다도 주거를 마련하는 일이 시급한 문제였다.
아이들의 하루 세 끼 식사에 허덕이면서도 두 사람은 주택 자금을 위한 기금 마련에 동분서주했다.
그리고 해방을 맞았다.
2차 세계 대전은 일본의 전면적인 패배로 끝나고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했다.
1945년 8월 15일, 남편의 나라 한국은 승자가 되고 그제까지 절대 지배자로 군림하던 일본인은 하룻밤 사이에 패자로 처지가 바뀌었다.
치즈코는 다른 많은 이국처(異國妻)와 마찬가지로 고국으로 철수할 것인가, 남편을 따라 잔류할 것인가로 불면의 밤을 보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입장이 역전되자 이제까지 쌓여왔던 민족 감정이 봇물 터지듯 폭발함은 당연지사였다.
일본 여자란 이유 하나로 치즈코의 주위에는 험악한 공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때 치즈코에게는 이미 두 아이가 있었고 세 번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노모(老母)는 고향 고치로 돌아가게 되었다.
겉으론 아무 말씀이 없으셨지만 될 수 있으면 함께 귀국해 주길 바라는 눈치셨다.
윤 원장은 아내에게 말했다.
“당신의 고민은 잘 알아. 설사 당신이 귀국을 결심했대도 나는 원망하지 않소. 하지만 당신이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남이 든다면 난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을 지키겠소.”
치즈코는 이 이상 마음의 동요를 갖지 않기로 했다.
일본인 처 중에는 미묘한 상황에 놓여 번민하던 끝에 이혼을 당하는가 하면 그날로 생계가 곤란해진 사람도 많았다.
설사 남편의 이해가 있다 해도 시댁 식구들이 일본 여자는 어깨가 좁다는 둥 트집을 잡아 남편까지 시달림을 당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불안한 나날을 보내는 치즈코의 마음을 밑바닥부터 뒤흔들어 놓는 중대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인을 아내로 둔 윤치호를 친일파라 하여 보이지 않는 탄압이 시작된 것이다.
그것이 표면화된 날이 왔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윤치호 암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우연히 원아 몇 명이 듣게 되었다.
원아들은 그 길로 산을 넘어 공생원에 달려와 외출 중인 윤 원장이 오늘 밤엔 원에 돌아오셔선 안 된다고 치즈코에게 알렸다.
절박한 위기 사태에 발끝부터 떨리고 공포와 함께 배신감으로 가슴까지 떨려왔다.
이날까지 남편은 자신을 위해선 어떤 일도 벌인 적이 없었다.
매년 정월 초하루 전날이면 기다렸다는 듯 언덕 위에 올라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는 집을 살펴 그 집에 떡살을 갖다 주던 그가 아닌가? 그런 남편에게 죽어 마땅한 잘못이 있단 말인가?
단지 일본인 아내를 두었다는 사실만으로 남편은 생명을 위협받고 있었다.
공포감 때문에 도저히 진정할 수가 없었다.
그런 치즈코에게 아이들이 위로해 주었다.
“어머니, 어머니가 일본인이래도 우리 어머니임엔 변함없어요. 우리도 가만히 있진 않을 거예요.”
큰 아이부터 작은 아이까지 손에 막대기와 돌을 들고 눈물을 흘리는 아이들의 모습에 마을 사람들은 살의를 잃고 물러갔다.
“고맙다. 고마워.”
치즈코는 아이들을 부둥켜안고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 그녀는 전 생애를 이 아이들을 위해 바칠 각오를 굳혔다.
수년이 지나 대망의 강당이 완공되었다.
공생원도 20주년을 맞이했다.
한때 윤 씨 부부를 살해하려 음모를 꾸몄던 마을 사람들이 2m 높이의 ‘공생원 20주년 기념탑’을 세워주었다.
어머니는 여기까지 이야기하고는 말씀을 중단하셨다.
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주시했다.
어머니는 울고 계셨다.
“후회하고 계세요?”
나는 확인하듯 물었다.
“모두가 하나님의 뜻이었어.”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운명?’
나는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그것은 불가항력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운명이란 한마디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와 결혼하신 걸 후회하지 않으세요?”
나는 어머니의 마음을 거듭 확인하고 싶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의지가 강한 분이셨어. 그 숱한 사람을 이끌고 감동시킬 수 있는 힘을 갖고 계셨던 거야.”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어머니를 동정해서가 아니었다.
나약하게만 보이던 어머니가 사실은 누구보다도 강한 분임을 그 순간 확인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