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공생원의 사무보조가 소란스럽게 사무실로 뛰어 들어왔다.
“원장님! 서울에서 전화가 왔어요. 치즈코 씨를 바꿔 달라는데요?”
어머니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무지 짐작 가는 곳이 없었다.
“여보세요, 제가 윤학잡니다만….”
“예, 여기는 서울신문사예요. 우선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제18회 광복절을 맞아 정부에서는 치즈코 여사에게 문화 훈장 국민장을 수여하기로 했습니다. 먼저 문화 훈장을 수상하시게 된 소감부터 한마디 해주시죠.”
“잘못 거신 게 아닌가요? 저는 윤학잡니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인 남편 성을 따서 윤학자로 성함을 바꾸신 것도 알고 있습니다. 본명은 다우치 치즈코(田內千鶴子) 씨죠?”
“네.”
수화기를 든 손이 떨렸다.
“갑작스러운 이야기라 그저 어리둥절하군요. 무엇부터 먼저 이야기해야 좋을지…. 전 그저 남편이 돌아오기만 기다리며 남편이 하던 사업을 지켜왔을 뿐입니다.”
서울신문사 기자는 이 요령부득의 인터뷰에 거듭 축하 인사를 되풀이했다.
“아무튼, 축하드립니다.”
어머니는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사무실에 모여 있던 사람은 모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어머니! 무슨 전화예요?”
“응, 잘은 모르겠다만 광복절 날에 무슨 상을 받게 됐다는구나. 국민장인가 문화 훈장인가 하던데…”
어머니의 담담한 반응에 오히려 사무실의 모두가 더 놀랐다.
훈장 소식은 순식간에 원내에 퍼졌다. 훈장의 뜻도 모르는 꼬마들까지 들떠서 만면에 웃음을 흘리며 팔짝팔짝 뛰어다녔다.
서울신문사의 인터뷰를 시작으로 매스컴의 취재가 빗발쳤다.
사무실은 취재 나온 기자들을 접대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윤학자 씨의 사진이 필요한데요. 가능하면 원아들과 함께 찍은 사진으로 부탁합니다.”
“현재 원에 수용된 아동은 모두 몇 명입니까?”
“윤학자 여사의 이력서 좀 부탁합니다.”
수시로 몰려오는 인터뷰 요청에 어머니는 덤덤히 응하셨다.
답변은 어느 기자에 대해서나 한결같았다.
“남편이 생명을 걸고 고군분투하며 일으킨 공생원을 남편이 돌아올 날을 기다리며 지켜온 것뿐입니다. 저는 아무런 고생도 하지 않았습니다. 고생이라면 아이들이 했지요.”
1963년 8월 15일 어머니 치즈코는 독립운동이 일어난 광주서중학교 운동장에서 한국 최고의 영예인 훈장을 받았다.
전라남도 지사의 손을 거쳐 수여된 훈장을 왼쪽 가슴에 단 어머니는 누가 봐도 한국 여성이었다.
흰 치마, 저고리가 눈부실 정도로 잘 어울렸다.
* * *
광복절에 훈장을 받은 후 어머니는 일종의 흥분을 가눌 수 없었다.
한국과 일본 양국에 바야흐로 해빙기가 도래하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날이 오길 얼마나 고대했던가!
어머니 치즈코는 양국 간의 메신저로서 조국 일본을 방문할 결심을 굳혔다.
일본을 방문하기로 한 며칠 뒤, 어머니는 갑자기 가슴 근처에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통증과 함께 호흡이 곤란할 지경의 이상도 수반됐다.
어머니는 처녀 시절 폐렴을 앓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결핵이 재발한 건지도 몰랐다.
하필이면 이 중요한 시기에…. 어머니는 초조하고 불안했다.
자신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러나 병세는 날로 악화하여 갔다. 얼굴도 눈에 떨 정도로 수척해졌다.
“어머니,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시죠.”
곁에서 보다 못한 범치 형이 진찰받을 것을 종용했다.
동산 외과를 찾은 어머니를 조 박사는 조심스레 진찰했다.
“옛날에 가슴을 앓은 적이 있습니까?”
어머니는 처녀 시절에 폐결핵으로 2년간 요양 생활을 했다고 밝혔다.
“그렇군요. 그 후로 공생원에서 원아들 뒷바라지하시느라 자신의 몸을 제대로 돌볼 여유가 없으셨겠군요. 몸에 이상이 온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가슴에 염증이 나타나는데 옛날에 치료받으신 자국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약을 지어드릴 테니 복용해 보십시오.”
공생원으로 돌아온 어머니에게는 여느 때와 변함없이 과다한 업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병세는 여전했다. 나을 기미라곤 보이지 않고 도리어 심한 두통이 시작되었다.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그럴 순 없었다.
정 총무가 일본 출국을 위한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한시바삐 일본엔 가야겠는데 가슴의 통증과 두통은 가실 줄 몰랐다.
‘빨리 나아야 할 텐데…. 일본에 가면 더욱 바빠진다. 벅찬 업무가 잔뜩 기다리고 있는데 일본에까지 가서 병이 악화하는 날엔 정말 큰 일이다.’
어머니는 조바심 나는 마음으로 건강이 회복되기만을 기도하며 쉴 새 없이 일을 진행했다.
“장모님! 비자가 나왔습니다. 이제 비행기만 예약하면 돼요.”
정 총무는 방일(訪日)에의 기대와 기쁨에 사로잡혀 흥분하고 있었다.
정 총무 그는 6·25 동란이 발발한 1950년, 열아홉의 나이로 고향 진남포에서 월남하여 친구들과 목포까지 피난해 온 청년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는 편이었던 그는 어머니를 도와 일했으며 어머니는 그에게 대학에서 공부할 기회를 주었다.
오늘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원의 운영난에 허덕이며 남몰래 고민하던 무렵 어머니는 가까이에서 의지하고 의논할 만한 상대가 없었다.
장남인 나는 나이가 너무 어렸다.
어머니에게는 마음을 털어놓고 의논할 사람이 필요했다.
어머니는 정의감이 강한 청년, 정 총무를 가족으로 맞이하고픈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장녀 청미를 그와 결혼시켰다.
어머니는 조용하고 꼼꼼한 성격인 데 반해 정 총무는 활발하고 사교적이며 때로는 자기 본위로 사물을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같은 성격의 사위, 정 총무를 곁에 두고 일을 하는 데 성격 차이는 있었지만 믿음직스러웠다.
정 총무는 장모 치즈코와의 일본 방문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의 지나친 기대가 불안했다.
마음이 무거웠다.
“일본에 가는 일에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게 고아 사업이란 게 쉬운 일이 아닐세. 일조일석에 큰 변화나 진전을 바랄 수는 없네. 또 그것을 기대해서는 안 돼.”
어머니는 기대에 부풀어 있는 정 총무를 타일렀다.
모국 방문. 어머니로서는 문화 훈장을 수상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기쁨보다는 정신적인 부담감이 훨씬 무거웠다.
‘이번 일본 방문으로 아무런 성과도 올리지 못한다면….’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했다.
“장모님! 이번엔 대대적으로 모금을 벌여 한국 제일의 고아원을 만듭시다. 일본 국민도 크게 협력해 줄 겁니다.”
정 총무에게는 청년다운 야심과 패기가 있었다.
주변 이웃들이며 지지자들 모두가 격려해 주며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왠지 기대대로 잘될 것 같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어머니의 방일에 대한 주변인들의 기대에 찬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어머니의 마음은 미묘하게 동요했다.
불확실한 앞날에 대한 걱정만이 앞섰다.
‘한국인인 윤치호 씨를 사랑하여 결혼하고, 한국인으로 살며. 한국인 자녀를 낳고, 또 하나님의 은총으로 수많은 고아를 양육하며, 한국에서 가장 자녀가 많은 어머니가 되었다. 고생하더라도 한국에서 고생하고 싶다. 한국 정부와 한국민도 이해하고 협력해 주는데, 구태여 고국에까지 가서 머리를 숙일 필요가 있겠는가.’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네다(羽田) 공항에는 수많은 인파가 환영을 나왔다.
그중에는 다카오 선생님의 모습도, 친구 오치아이(落合) 씨의 모습도 보였다.
어머니 치즈코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중히 인사한 뒤 동행한 정 총무를 소개했다.
일·한(日韓) 우호 협회의 정한영 씨와 하나와 사부로(三郞) 씨도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머니는 정한영 씨의 호의로 그의 자택을 거점으로 활동했다.
일본 여성과 결혼한 정한영 씨는 한국과 일본이 우호를 맺어야 한다는 신념에 차 있었다.
그는 ‘우호’란 잡지를 간행하면서 양국의 국교 정상화의 핵심적 역할을 해 온 인물이었다.
덕분에 어머니는 각 방면의 유력 인사를 만날 수 있었다.
어머니는 먼저 일본에 오게 된 취지문을 작성했다.
어머니의 호소는 읽는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다.
신문과 방송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훌륭하다는 칭찬의 소리도 들려왔다.
그러나 어머니는 환호성 속에서 고독하게 질주하는 마라토너의 심정이었다.
‘나는 마라톤 주자와 같다. 도로변에서 시민들은 열렬한 응원을 보내준다. 그것은 가슴 뿌듯한 격려다. 그러나 아무도 주자를 대신해서 뛰어 줄 수는 없다. 주자는 끝까지 주자여야 한다.’
표면에 흐르는 환성과 관심과 비교하면 실질적으로 구체적인 힘이 되어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드물었다.
어머니의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나의 조국은 아직 이웃 나라에 눈을 돌릴 마음의 여유가 없는 걸까? 그렇지 않으면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아 남을 도울 만한 여유가 없는 걸까?’
일본에 온 것이 6월, 벌써 석 달이 지났건만 성과다운 성과는 아무것도 없었다.
10월 말이면 목포로 돌아가야 한다.
10월에는 300여 명의 대가족이 겨우내 먹을 김장 준비로 바쁘고, 12월에는 크리스마스 행사가 있다.
새해가 되면 진학생들의 학비며 졸원생(卒園生) 취업 문제도 해결해야 하는데….
성과 없이 하루하루를 지내기란 괴롭기 그지없었다.
모두가 아직 기대감에 취해 있었다.
어머니의 심중을 헤아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한영 씨와 정 총무는 일본을 쥐고 흔드는 경제계 인사들이 취지서에 찬동했으니 잘될 거다.
이제부터 그 실력자들을 잘 이용하면 소기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다는 기대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런 일보다 소액이라도 좋으니 아이들에게 실질적인 성과를 가져다주고 싶었다.
원아들은 일본에 간 어머니가 무얼 가지고 돌아오실까 고대하고 있을 터였다.
직원은 직원대로 어머니의 방일을 계기로 발전하게 될 공생원을 그리며 꿈에 부풀어 있을 것이다.
목포 시민들도 마찬가지로 뭔가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정한영 씨와 몇몇 사람들의 노력으로 후원회가 발족한 것은 10월이 넘어서였다.
많은 사람이 “치즈코 씨를 돕자”라며 성원을 보내왔으나 성원만으로는 부족했다.
확실한 무언가 있어야 했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거점으로 한, 요컨대 후원회가 필요했다.
각계각층에서 활약하고 있는 사람이 많은 만큼 회장 선출은 신중을 기울여야 했다.
회장은 각 분야에 영향력을 가진 신뢰받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러나 적임지를 찾아내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최적임자가 나타나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우에무라 코고로(植村甲午郞) 씨였다.
당시 일본 경제인 연합회의 부회장이었던 우에무라 씨는 원만한 인격자로 일본 안에서도 덕망 있는 지도자였다.
우에무라 씨의 회장직 수락으로 후원회 조직은 급속히 진전되어갔다.
도쿄 클럽의 조찬회에서 열린 발기인 대회에는 예상을 뒤엎고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
전 수상을 비롯하여 국회의장, 장관 그리고 경제계의 유력한 사장들이 참석하였다.
어머니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이분들의 협력이라면 지금까지처럼 먹는 걱정, 학비 걱정하지 않고도 남편의 유업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올림픽이 개최되던 1964년 10월 17일의 일이었다.
10월 말 어머니는 일본에서의 활동을 마치고 귀국하셨다.
* * *
가을도 깊어지고 공생원 앞바다는 푸른빛을 한층 더해 갔다. 유달산은 하늘을 향해 그 웅장한 자태를 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항상 이쪽에서 말을 건네기만 하면 위로해 주고 피곤마저 덜어주던 대자연의 모습마저도 지금은 어쩐 일인지 시들하고 무관한 사물처럼 생각되었다.
‘아! 피곤하구나.’
무리한 여행 때문일까?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어머니는 요즘 심한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자리에 누워 쉴 여유가 없었다.
먼저 호의를 보내준 분들께 감사장을 써야 했다.
편지를 쓰고 있는 어머니에게 정 총무는 A 씨에게는 이것을, B 씨에게는 저런 사업을 부탁하면 효과가 있을 거라며 주문에 열을 올렸다.
적절한 코치라고 볼 수도 있었으나 어머니로서는 괴로운 주문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몸과 마음, 그 모든 것을 혹사해 가며 목전의 현실과 부딪치는 사람이었다.
아이들의 식량이 떨어지면 스스로 리어카를 끌고 마을로 나가 찬거리가 될 만한 것을 구하러 다녔다.
아이가 병이 나면 둘러업고 이곳저곳 병원을 쫓아다니는 열성, 단지 그것만이 전부였다.
어머니는 고아들을 키우는 일을 사업이란 말로 총괄하는 데 심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정 총무가 이것저것 코치했으나 이해되지 않는 일도 많았다.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정 총무의 말을 듣고 있으면 당장에라도 원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단호히 거절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발목의 힘이 빠지고 몸이 허공으로 치솟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순간 의식을 잃고 말았다.
어머니가 의식을 회복한 것은 그로부터 네 시간 뒤 박동철 내과에서였다.
박동철 박사의 권유로 어머니는 서울 세브란스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정 총무가 달려갔다.
“몸이 극도로 쇠약해지셨습니다. 기력이 빠져서 쓰러진 겁니다. 당분간 푹 쉬시면 좋아질 거라고 하셨습니다.”
정 총무는 의식을 되찾은 어머니에게 진단 결과를 이야기했다.
걱정할 것 없다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안정을 취할 수 없었다.
일본까지 가서 고생하고 부탁했던 일이 모두 수포가 될지도 모른다.
게다가 치료비는 어떻게 변통할 것인가?
내가 계속 이런 상태로 지낸다면 원아들의 장래는 누가 돌봐줄 것인가?
어머니의 가슴속은 불안으로 가득했다.
어머니는 수술이 필요했다.
“어머니! 내일 수술을 한대요. 세브란스 병원에서 제일 훌륭하신 김 박사님이 직접 집도해주신대요. 그러니 염려하실 것 없어요.”
나는 어머니를 안심시키려 애썼다.
겉으론 평온을 가장하면서도 내심 불안을 떨칠 수가 없었다.
수술을 앞둔 어머니는 오히려 입가에 웃음을 띠고 안정하신 듯 보였다.
세 시간에 걸친 폐종양 제거 수술은 성공이었다.
어머니의 입원 소식을 듣고 택시 운전사로 일하고 있던 재균이가 달려왔다.
“어머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어머니가 이런 대수술을 받으실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큰소리로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 이런 때야말로 힘이 돼 드려야 하는 건데 아무런 도움도 못 돼 정말 죄송해요.”
치료비에 써달라며 재균은 5만 원을 놓고 갔다.
조금 있으려니 이젠 성인이 된 아이들이 잇달아 모여들었다.
재균이 연락했던 것이다.
모두가 넉넉지 못한 생활에 시달리면서도 어머니의 입원비를 걱정했다.
행복한 순간이었다. 어머니는 바로 이런 것들이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믿음직한 자식을 많이 갖고 있음을 진심으로 감사해했다.
2개월에 걸친 병원 생활을 마치고 어머니는 아이들이 기다리는 공생원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