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식 때는 어머니가 와주셨다.
그날 나는 졸업생을 대표하여 공로상을 받았다.
기념품인 큰 성경책을 가슴에 안고 어머니와 기념사진도 찍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나는 강만춘 교수와 동행하여 강원도 홍성군의 한 목장을 방문했다.
중앙신학교 설립자인 이호빈 목사가 농촌 운동을 시작한 곳이기도 했다.
강 교수는 학교 문제를 상의하고자 이 목사를 찾아뵌 것이었다.
정부의 방침은 신학교와 사회복지학교의 분리를 요구했지만, 학교 사정은 두 개 학과를 독립시킬 능력이 없어 부득이 사회복지 학과를 폐쇄해야 할 형편이었다.
사회복지학 과장인 강 교수는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 목사와의 상담이 진전을 보지 못한 재 끝나버려 강 교수는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 같았다.
“동창회에서는 대책을 세우고 있습니까?”
“모두 걱정하고 있지. 하지만 시일이 촉박한 데다 학교 설립이 쉬운 문제가 아니라서….”
“전통 있는 학과를 살리든지 아니면 이를 기회로 좀 더 큰 규모로 발전시키라는 하나님의 계시인지도 모릅니다. 정부가 제2 경제라 하여 정신 개혁 운동을 부르짖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좋은 기회라 봅니다.”
물끄러미 나를 응시하며 생각에 잠겨있던 강 교수가 입을 열었다.
“윤 군, 자네가 해 보지 않겠나?”
“제가요?”
“그래. 자네라면 기능할지도 몰라 현재의 공생원을 사회복지 대학의 부속 시설로 삼아 학생들의 실습장으로 활용하면 일거양득이 아니겠나?”
강 교수와 나는 밤이 늦도록 꿈의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제일 먼저 어머니에게 상의드렸다.
“놀라지 마세요, 어머니. 이제부터 복지 대학을 만드는 거예요.”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점점 아버지를 닮아가는구나. 느닷없이 대학을 만든다니….”
“어머니가 걸으실 길은 한 손에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을 양성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 사업은 어머니의 마지막 사업 이 될 겁니다.”
어머니는 기뻐하셨다.
앞으로의 시대는 자선 사업만으로는 부족하다.
전문 지식을 보급하여 고아도 올바르게 사회생활을 할 수 있게 하여 다시는 사회의 고아가 되지 않도록 키워야 한다.
어머니의 가장 큰 고민은 직장도 없이 공생원을 떠난 아이들이 사회에서 살길을 찾지 못하고 마음에 상처만 입은 채 원으로 되돌아오는 일이었다.
평소 어머니는 고아가 적은 사회를 만들고 싶다고 기도해 왔다.
“대학생들이 연일 벌이는 일본 타도 시위 보셨죠? 다른 분야는 몰라도 사회복지 분야에 있어서만은 한국과 일본 양국 간에 진정한 마음의 교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갓 스물다섯인 저에게 대학 설립 이야기가 나온 것도, 중앙신학교에 입학해 사회사업을 공부한 것도 모두가 하나님의 예정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찬성하셨고, 드디어 한국 사회복지 대학 설립 발기인 대회를 발족했다.
여권이 나왔다.
다우치 모토이(田內基).
아무리 여권을 들여다봐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내가 일본 사람이라니.
하지만 누가 봐도 이 여권은 틀림없는 일본인 것이었다.
나는 타인의 여권을 갖고 여행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재차 모국을 방문하고자 마음먹었다.
폐암 수술 후 경과가 좋아 계획했던 일본 방문을 실행하게 된 일도 기뻤지만, 동행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한 아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도 큰 기쁨이었다.
그 반면에 염려스러운 일도 많으셨는지 동행하는 나에게 무척 신경을 쓰셨다.
“식사 때는 소리를 내지 않도록 하거라.”
“손님 앞에서는 공손히 굴어야 한다. 알았지?”
어머니에게는 아직도 내가 초등학교 코흘리개처럼 여겨지시는 모양이었다.
“주의 사항 이제 없어요?”
너무나 많은 주의 사항에 약간 시큰둥해진 내가 큰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말했다.
“일본에 도착하면 말도 조용히 해야 한다.”
어머니는 전라도 사투리를 사용하고 있었다.
나는 마음이 떨렸다.
비행기를 타는 것도 태어나 처음이고 어머니와 함께 여행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불안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앞으로 지내게 될 6개월이 흥미로웠다.
김포 공항에 전송나온 강 교수, 누이 내외, 친구 승범 등의 전송을 받으며 어머니와 나는 여행자 전용문으로 향했다.
세관을 통과하고 법무부의 출입국 심사대 앞에 섰다.
“한국에는 언제 오셨습니까?”
일본 여권을 소지한 나에게 질문이 날아왔다.
직원은 일본어로 묻고 있었다.
나는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어리둥절했다.
“뭐라고 하셨죠?”
한국말로 답하는 나에게 출국 심사관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다우치 씨는 한국인인 저보다 더 한국어가 능숙하시군요.”
“뭐, 뭘요.”
“아닙니다. 저는 김포 공항에서 오래 근무했지만 다우치 씨만큼 완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일본인은 처음입니다.”
일본인 다우치 모토이가 출국 시점에서 칭찬을 받았다.
나는 복잡한 심경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비행기는 불과 두 시간도 못 되어 하네다(羽田)에 도착했다.
처음 보는 일본의 관문이었다.
어머니와 떨어질세라 곁에 바싹 붙어 걸었다.
마치 미아가 될까 겁내고 있는 초등학생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왼손은 어머니의 가방을 꽉 쥐고 있었다.
어머니 꽁무니를 졸졸 따라가던 나는 입국 심사에 걸리고 말았다.
“도쿄에서는 어디서 묵으실 겁니까?”
뜻은 대충 알아들었지만, 답변이 잘되지 않았다.
이곳은 하네다니 한국어로 대답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입국 심사관의 얼굴을 멀뚱히 보고 있었다.
재차 같은 질문을 던졌다.
나는 여전히 눈만 껌벅거리고 있었다.
나를 벙어리로 단정한 모양이었다.
“어디서 묵을 거죠?”
급기야는 종이에 글자를 써서 보여 준다.
출국 전, YMCA 호텔은 세계 어느 국가에 가도 있다고 한 강 교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는 재빨리 ‘도쿄 YMCA’라고 썼다.
가까스로 통과되었다.
앞서 통과한 어머니는 내 일이 걱정됐던지 도와주러 오셨다.
나는 무의식중에 한국어가 튀어나왔다.
“어머니 저 사람이 뭐라고 하는 거죠?”
입국 심사관은 농아로 믿고 있던 내가 입을 열자 아연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일본인이면서 일본어를 한마디도 못 하는 데 격분했던지 어머니를 나무랐다.
“외국에서 사는 것은 자유입니다만 자기 나라말을 모르는 건 곤란하지 않습니까?”
아마도 그런 뜻인 듯했다.
어머니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일본어를 가르치지 않은 건 어머니였다.
나를 한국인으로 키워오신 것이다.
어머니는 항상 내가 한국인으로 성장하길 염원하셨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은 일본어라고는 한마디도 못 하는 아들이 안타까워 견딜 수 없었다.
한때 공생원의 보모로 근무하다 일본에 귀국한 H 씨의 집으로 향했다.
H 씨는 자녀 셋과 함께 방 두 개와 작은 부엌, 화장실이 딸린 도영 주택에서 살고 있었다.
나는 안심했다.
수중에 돈이 넉넉지 못한 우리로서는 돈에 맞춰 묵을 수 있게 된 것이 무엇보다 큰 다행이었다.
H 씨의 가족이 모두 한국어를 일본어보다 훨씬 능숙하게 할 줄 아는 것도 다행스러웠다.
도쿄에서의 첫날 밤을 H 씨의 집에서 보낸 어머니와 나는 이튿날 새벽 5시에 일어나 NHK에서 보내준 자동차를 타고 NHK 스튜디오로 향했다.
차창 밖은 아직 어둠에 잠든 듯한 풍경이었으나 NHK 홀 안은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열기로 이미 한창이었다.
어머니 치즈코가 출연할 프로는 ‘스튜디오 102’라고 했다.
나는 ‘스튜디오 102라, 별난 프로도 다 있네’라고 생각했다.
어머니께서 아나운서, 프로듀서와 대담하고 토론하는 장면을 보면서 묘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방송이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침착했다. 흰 치마저고리가 아들인 내 눈에도 눈부시게 보였다.
남편 나라의 의복을 입고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어머니는 누가 봐도 한국의 어머니임이 틀림없었다.
사진을 곁들여 십여 분간 공생원이 소개되었다.
말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어떤 내용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방영이 끝나자 NHK로 진화가 쇄도했다.
맨 처음 전화는 하시모토(橋本) 관방장관(官房長官)으로부터였다.
어머니와 나는 관방장관이란 직책이 어떤 것인지 몰랐다.
한국의 문화공보부의 일부 역할과 대통령 직속의 청와대 대변인과 총무부의 역할이 합쳐진 것임을 후에 알게 되었다.
잇달아 전화가 걸려왔다.
그중에 노리타니(車谷)라고 자신을 밝힌 사람의 전화도 있었다.
텔레비전을 봤는데 꼭 한번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쾌히 승낙했다.
NHK 홀을 나온 뒤 도쿄역에서 전차를 탔다.
플랫폼이 너무 많아서 눈이 핑핑 돌았다.
어머니는 곧 목적한 전차를 찾아냈다.
블루(BLUE) 전차였다.
아카바네(赤羽) 역에서 하차한 우리는 택시를 잡아타고 몇 분을 달렸다.
택시는 작은 공원 앞에서 멈췄다.
그 공원이 약속 장소인 듯했다.
어머니는 확인하듯 잠시 주위를 휘 둘러본 후 완만한 언덕길을 올라갔다.
2층 양옥집 앞에서 발을 멈췄다.
‘노리타니’란 문패를 확인하곤 벨을 눌렀다.
“역에서 전화하셨으면 모시러 나갔을 텐데요. 용케 찾으셨군요.”
2층으로 안내되어 초대면의 인사를 나눴다.
어머니는 한사코 고개를 숙이고 계셨다.
이제야 고개를 드시는구나 싶으면 또 뭔가 이야기하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그 시간이 꽤 길게 느껴졌다.
나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좋을지 몸 둘 바를 몰랐다.
어머니를 흉내 내려고 해도 머리가 숙여지질 않았다.
일본식 인사법이 몸에 배지 않아서인지 어색할 뿐이었다.
나중엔 두 사람의 인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응접실 중앙에는 육중한 테이블이 놓여 있고 벽에는 시원한 풍경화가 걸려 있었다.
아름다운 꽃꽂이가 방을 환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노리타니 씨는 인정미가 있어 보였다.
“오늘 아침 텔레비전에서 봤습니다. 패전(敗戰) 후 우리 가족은 생활이 어려워 한때는 자살까지 생각했었는데. 부인은 남편도 없이 그 수많은 고아를 키우셨다니 정말 훌륭하십니다. 남편의 소식은 아직 못 들으셨는지요?”
“네, 소식이라도 들으면 좋을 텐데….”
어머니는 조심스레 대답하고는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녹색의 차는 아무 맛도 없고 쓰기만 했다.
‘이런 쓴 물을 고급스러운 그릇에 담아 마시다니 일본인은 참 이상한 데 사치를 부리는구나.’
라고 생각하며 두 분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노리타니 씨는 이북 정주가 고향이라고 했다.
정주라면 유명한 시인. 김소월의 고향이 아닌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김소월. 그 소월도 정주가 고향이다.
그런데 노리타니 씨는 고향의 위대한 선배, 아니 한국이 낳은 천재 시인을 모르고 있었다.
노리타니 씨는 자신의 고난에 찬 인생을 털어놓았다.
“저는 14세 때 일본으로 건너왔습지요. 돈도 기술도 없어 철공장에서 막일을 했습니다. 밑천이라곤 이 몸뚱이 하나였습니다. 1943년부터 그 이듬해라고 기억됩니다만, 북한에 살고 있던 부모와 형제가 모두 남한으로 이사를 했다는 편지가 왔더군요. 그 무렵 도쿄는 밤낮으로 B29의 폭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방공호로 피난하면서 그만 고향에서 온 편지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시는 저도 젊었기 때문에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지 않고 지나쳤는데 결국은 그것이 부모님께서 제게 보낸 마지막 편지였습니다.”
노리타니 씨는 옛일을 회상하는 듯했다.
나는 조용히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전쟁이 끝나고 살기 위해 별의별 고생을 다 한 끝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그때 아내의 친정에선 제가 한국인이란 이유로 거센 반대를 했기 때문에 우리는 하는 수 없이 한 칸짜리 방을 얻어 신혼살림을 차렸습니다.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만 고생한 보람이 있었는지 지금은 렌즈 공장을 경영하고 공원도 200명쯤 됩니다. 렌즈는 유명 메이커에 납품하고 있고 장차 꿈은 노리타니 카메라를 생산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하는 노리타니 씨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한국어와 일본어를 반씩 섞어 사용하는 까닭에 나도 대충은 뜻을 파악할 수 있었다.
“사업도 안정 궤도에 오르고 세 아이도 다 크고 나니 부모님과 형제들이 보고 싶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많아졌습니다. 아이들에게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신다는 걸 알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다행히 한·일 양국의 국교도 정상화되어 아는 사람들 통해 이곳저곳 수소문해 보았습니다만 찾을 길이 없군요.”
노리타니 씨는 깊은 한숨을 지었다.
그리고 사업상 부득이 일본인으로 귀화하여 현재의 성을 따로 갖게 되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어머니와 나는 노리타니 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족과 헤어져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이 우리뿐만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우리도 아버지의 귀가를 얼마나 학수고대했는지 모른다.
남의 일이 아니었다.
두 개의 이름과 두 개의 조국을 가진 노리타니 씨 부모님의 안부와 무사를 비는 간절한 마음이 이해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부모님을 찾아 달라고 부탁하는 절박한 심정이 가슴에 와닿았다.
나는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참고가 될 만한 사항을 자세히 알아보았다.
살아 계시면 연세가 얼마나 되겠냐고 물으면서 김 씨, 박 씨, 이 씨 같으면 어렵겠지만 차 씨는 희소한 성이므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위로했다.
나의 질문이 끝나자 그는 편지 한 통을 내밀며 읽어달라고 했다.
순간 일본어일까 봐 덜컥 겁이 났다.
일본어를 모르는데 어떻게 읽어야 하나?
나는 편지를 받아 매우 자연스럽게 어머니에게 넘겨주었다.
어머니는 편지를 펼치더니 다시 내게 돌려주셨다.
잘 보니 한국어로 씌어 있었다.
한국 사람이면서 일본인이 되어, 한국말을 모르는 교포에게, 한국 사람이면서 일본인이 되어 한국말밖에 못 하는 내가 그 편지를 읽게 되었다.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또 있겠는가?
편지를 읽기 시작한 나는 곧 입을 다물고 말았다.
순간 못할 이야기를 한 것처럼 얼굴이 빨개졌다. 어머니도 물론 놀랐다.
그 편지의 겉봉에는 일본에 사는 삼촌 ‘노리타니 씨 앞’이라고 쓰여있었다.
편지의 서두부터 전율하는 공포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위대하신 김일성 수령의 특별한 배려로 저희 가족은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으니 염려 마십시오. 저희는 한시바삐 박정희 도당을 쳐부수고 미 제국주의 압제하에 신음하고 있는 남조선 동포를 위해 통일의 날이 오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삼촌에게 보낸 조카의 편지에 위대한 김일성 수령이 무엇 때문에 튀어나오는 건가? 박정희 도당이라니 그것은 무슨 뜻인가? 그리고 미 제국주의의 압제하에 신음하는 남조선 동포는 또 뭔가?
생각지도 못한 극렬한 내용에 나는 흥분을 가누지 못했다.
그러나 나보다도 더 당혹해하고 무거운 기분에 안절부절못하는 것은 노리타니 씨 쪽이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 북한을 택할 것인가, 부모 형제가 남하한 남한을 택할 것인가로 늘 번민한 터였다.
“니가타(新潟)에서는 정기 화물선이 북한으로 왕래하고 있습니다. 부모님과 친척들의 소식이 듣고 싶어 아는 사람을 통해 고향의 옛날 주소로 편지를 보냈는데 그 답장이 이것이죠.”
나는 그 편지가 과연 조카의 것인지 의심스러웠지만 회화가 불가능한 터라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는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세계의 어느 나라엘 가도 공산 체제보다는 민주 체제 국가가 훨씬 풍족하고 복된 생활을 누리고 있는데 어째서 한국은 예외냐? 왜 거렁뱅이, 고아, 도둑이 득실거리는 가난한 나라인 거냐?”며 비분을 억누르지 못했다.
그는 한국의 좋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만 물었다.
초면인 그에게 한꺼번에 진실을, 그의 조국을 이해시키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젊은 혈기의 나는 그에게 조국을 있는 그대로 알려야 한다고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