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쓴이
  • 윤학자공생재단

목포의 어머니 윤학자 여사, 고아들의 별이 되다

 

1. 거지대장

 

얘들아. 배 많이 고프지? 여기 감자를 조금 구해왔으니 다 같이 모여 나눠 먹자꾸나.”

며칠 동안 끼니를 거른 아이들은 감자라는 말에 눈이 초롱초롱 빛이 났어요. 모두 감자가 담긴 광주리 주변에 모여들어 주먹만 한 감자를 반으로 뚝 떼서 입안 한가득 집어넣고 우걱우걱 삼켰어요. 윤치호 원장은 아이들의 입에 음식이 들어가는 걸 보면서 오늘도 적은 음식으로나마 아이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윤치호 원장은 일제강점기 시절,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보살피며 살고 있었어요. 마을 사람들은 그를 거지대장이라고 불렀어요.

 

뭐야? 저 거지대장이 또 온 거야?” 시장의 채소가게 주인은 윤치호 원장을 보자 얼굴을 찌푸렸어요.

그래도 불쌍한 아이들 먹이려고 저렇게 애쓰는데 우리가 조금씩 도와주자고.” 그 옆 가게 아저씨가 솥에서 팔팔 끓고 있던 보리죽을 바가지에 퍼 담으면서 윤치호 원장을 불렀어요.

어이~ 여기 와 보슈. 오늘은 많이 줄게 없어서 이것밖에 못 담았소.”

아유. 고맙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정말 좋아할 것 같네요.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윤치호 원장은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어떻게든 다 같이 살아나갈 수 있다고 믿었어요.

그래, 부모를 잃고 오갈 데 없는 이 아이들을 내가 보살펴줘야만 해.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들을 지켜줄 거야.’

윤치호 원장은 매일 기도하며 부모 잃은 아이들을 거리에서 데리고 와서 키웠어요. 아이들의 수는 점점 늘어났고 다 같이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의 공생원이라는 고아원을 세우게 되었어요.

 

2. 다카오 선생님의 제안

 

띵띵똥 땡띵띵

목포의 정명여고 한 교실에서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왔어요.

치즈코 양! 역시 자네였군. 피아노 소리가 너무 좋아서 와봤는데. 치즈코 양 피아노 소리는 언제 들어도 참 행복하구나.”

조선총독부 하급관리였던 아버지를 따라 한국으로 건너온 치즈코는 목포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뒤 정명여고의 음악 교사로 취직을 하였어요. 그곳엔 치즈코의 학창시절 은사님인 다카오 마스타로 선생님이 계신 곳이기도 했지요.

다카오 선생님! 고맙습니다.”

치즈코 양, 자네 피아노 연주를 들으니까 생각나는 아이들이 있어서 그런데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되겠나?”

부탁이요?” 치즈코는 피아노 의자에서 몸을 돌려 다카오 선생님을 쳐다보았어요.

. 내가 예전에 우연히 공생원이라는 고아원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곳 아이들은 일본 순사들에게 부모가 끌려가거나 죽임을 당해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어 공생원에서 살게 되었더라고.”

치즈코는 말없이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런데 그곳의 아이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너무 어두웠어. 그게 내내 마음에 걸리더라고. 그 아이들이 고아가 된 데는 우리 일본인들의 잘못이 크니까 더 미안해지더구나.”

그랬군요. 너무 마음이 아픈 이야기에요. 선생님.”

치즈코는 공생원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안타깝고 가엾어 마음 한편이 아려왔어요.

치즈코, 자네가 그 아이들에게 웃음을 되찾아 줄 수 있겠나?”
제가요?” 치즈코는 자신이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지만, 아이들을 위해서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었어요.

 

3. 공생원과의 만남

 

안녕하세요, 다우치 치즈코라고 합니다.”

다카오 선생님의 소개로 공생원을 방문하게 된 치즈코는 윤치호 원장과 첫인사를 나누었어요.

, 안녕하세요. 우리 아이들을 위해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치즈코는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쳐주고 음악을 통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었어요.

무표정이었던 아이들이 치즈코와 음악을 만나면서 조금씩 웃음을 되찾기 시작했어요.

치즈코는 공생원 아이들을 정성스럽게 가르치고 보살펴주었어요.

 

공생원의 아이들이 점점 늘어나자 치즈코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윤치호 원장에게 물었어요.

그런데원장님. 이렇게 아이들은 계속 늘어가는데 이 많은 아이들을 앞으로 어떻게 먹이고 키우실 건가요?”

하하. 치즈코 양 걱정 마시오. 사랑이 있는 한 사람의 미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오.”

치즈코는 윤치호 원장의 그 단단한 믿음과 용기가 마음에 들었어요.

 

하지만 원장의 낙천적인 희망에도 불구하고 환경이 열악했던 공생원의 아이들은 잦은 병치레를 할 수밖에 없었어요. 제대로 된 병원 치료도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아이들도 몇몇 있었지요. 그때마다 치즈코는 끝까지 아이 곁에 머물러 주었어요.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보지도 못한 아이가 이렇게 세상을 떠나다니 너무 가여워.’ 치즈코는 숨을 거둔 아이를 꼭 안고 눈물을 흘렸어요.

치즈코는 공생원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가고 있었어요.

 

4. 윤치호 원장과 시작 된 부부의 삶

 

공생원 마당에 나무들이 고운 단풍으로 물 들어갈 무렵이었어요. 가을 햇살을 맞으며 마당을 걷고 있는 윤치호 원장에게 치즈코가 다가왔어요.

원장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머뭇거리는 치즈코를 윤치호 원장은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이야기를 경청하는 모습을 보였어요.

이 공생원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주고 싶어요. 평생 원장님 곁에서 아이들을 끝까지 보살필게요.”

윤치호 원장은 치즈코의 진심이 담긴 눈빛을 바라보며 두 손을 꼭 잡아주었어요.

두 사람은 평생을 공생원 아이들을 위해 일하는 협력자이자 서로가 의지할 수 있는 반려자로 부부의 연을 맺자고 약속했어요.

 

하지만 결혼식을 올리기까지의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어요. 마을에서는 원수 나라인 일본인과 결혼한다는 윤치호 원장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고 윤치호 원장의 어머니는 일본인 여자를 윤씨 가문의 며느리로 들일 수 없다며 식음을 전폐하였어요.

하지만 치즈코의 어머니는 그녀의 딸의 결정에 지지를 해주었어요.

결혼은 나라와 나라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과 사람이 만나 부부가 되는 것이야. 하늘나라에서는 조선인도 일본인도 모두 같은 형제 자매란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치즈코의 어머니는 치즈코가 하느님의 사랑으로 많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주었어요.

 

공생원이 개원 10주년을 맞던 193810. 목포 공회당에선 국경을 넘어선 그들의 사랑이 결실을 맺는 결혼식이 열렸어요. 결혼식에는 그들의 친인척뿐만 아니라 마을의 부랑인과 고아들로 북적거렸어요. 결혼식을 축하해주러 온 그들에게 따뜻한 팥빵을 대접하였어요.

치즈코는 이름을 윤학자로 개명하고 윤치호 부부와 정식 부부가 되었어요.

하지만 마냥 행복하게 웃고 있는 두 사람에게 닥칠 어려움들을 그땐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어요.

 

5. 해방 그리고 시련의 시작

 

1945년 일제강점기의 어두운 시절도 끝이 나고 드디어 해방을 맞이했어요. 새로운 빛을 찾은 대한민국의 거리엔 태극기 물결이 이어졌어요. 하지만 공생원의 윤치호 부부에게는 광복이 마냥 좋은 일 일수는 없었어요. 그동안 일본인들의 괴롭힘 속에 지내왔던 한국인들이 일본인을 바라보는 눈빛엔 분노와 원망이 가득했어요.

일본인인 윤학자 여사와 결혼을 한 윤치호 원장도 그 따가운 시선을 피해갈 수가 없었지요.

어이~! 여기가 우리의 원수인 일본인과 결혼을 한 매국노가 사는 곳인가?”

친일파를 찾아내어 처단하려는 한국인 무리들이 공생원에 들이닥쳤어요.

그들은 윤치호 원장과 윤학자 여사를 강제로 끌고 가려고 했어요.

이보시오! 이 여인은 비록 일본인이지만 나와 함께 부모를 잃은 이 아이들을 정성껏 보살폈소. 우리가 일본인들에게 고통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일본인이라고 무조건 미워해서야 되겠소.”

이 매국노가 지껄이는 소리 좀 들어보게나. 이 아이들의 부모가 누구 손에 죽임을 당했는데? 이 아이들이 왜 고아가 된 거냐고!”

윤학자 여사는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어요. 그녀의 뺨엔 눈물이 흘러내렸어요.

. 끌어내라고! 어찌 되었든 일본인은 우리의 원수야! 우린 그들을 용서 못 해.”

그들은 땅바닥에 쓰러진 윤학자 여사와 윤치호 원장의 팔을 잡고 끌고 가려고 했어요.

우리 엄마예요!”

그때 공생원 아이들 중 한 여자아이가 달려 나와 팔을 벌려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어요.

일본인이지만 우리 엄마란 말이에요. 우리 엄마를 데려가면 우린 어떡하란 말이에요. 제발 부탁이에요. 우리 엄마는 잘못한 게 없단 말이에요.”

작은 소녀는 울면서 소리쳤어요. 그러자 뒤에 있던 아이들도 모두 뛰쳐나와 소녀의 옆에 서며 울먹거렸어요.

우리 엄마 아빠 데려가지 마세요.”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마을 주민들도 거들었어요.

그렇소. 그 여인은 비록 일본인이지만 이곳 아이들을 수년간 정성껏 보살폈소. 그건 우리가 증명하오. 그러니 저 사람들은 두고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소.”

윤치호 부부의 팔을 잡고 있던 사람들은 주민들과 아이들의 말을 듣고 조용히 그들을 풀어주고 돌아갔어요.

하지만 그 이후로도 윤치호 부부를 찾아와 친일파라며 그들을 끌고 가려는 사람들은 끊이지 않았어요. 그럴 때마다 공생원 아이들과 주민들이 앞장서서 윤치호 부부를 지켜주었어요.

여보, 이 아이들이 우리를 지켜주었소. 우리도 끝까지 아이들을 보호해주고 지켜줍시다.”

윤치호 부부는 시련을 겪을 때마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믿음은 더 단단해져 갔어요.

 

6. 사라진 윤치호 원장

 

바깥의 분위기가 너무 좋지 않은데 이런 상황에 꼭 가셔야겠어요?”

윤학자 여사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윤치호 원장을 붙잡았어요.

내가 가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 당장 먹을 것이 없잖소. 광주 도청에 가서 지원을 부탁해봐야겠소. 며칠 뒤면 돌아올 테니 너무 걱정 마시오.”

19506.25 전쟁이 발발하자 목포 길거리에는 전쟁고아들이 넘쳐났어요. 그런 아이들을 다 데려와 생활하자 공생원의 아동 수는 5백여 명이 될 정도로 불어났어요. 전쟁 중이라 구걸도 어려운 상황에서 윤치호 원장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길을 나설 수밖에 없었어요.

전쟁 속에서 목포 시민들이 피난길에 오르는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오직 아이들만 생각하며 공생원을 나서는 남편을 윤학자 여사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어요.

새벽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윤치호 원장의 뒷모습이 결국 윤학자 여사가 본 마지막 남편의 모습이었어요. 윤치호 원장은 그 이후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결국 행방불명으로 더 이상 볼 수가 없게 되었어요. 전쟁 중이라 남편의 생사도 알지 못한 채 윤학자 여사는 홀로 공생원을 이끌어 가야만 했어요.

일본인이라 정부의 지원도 받을 수 없었기에 윤학자 여사는 리어카를 끌고 다니면서 구걸을 하러 다녔고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몸이 부서져라 가리지 않고 일했어요.

남편이 떠난 빈자리를 윤학자 여사는 홀로 메꾸며 공생원 아이들을 위해 한평생을 희생하며 살았어요.

주변에선 홀로 어머니가 살고 계신 일본으로 돌아가라는 권유를 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아이들을 두고 일본으로 돌아갈 수 없다며 끝까지 공생원을 지켰어요.

 

7. 3천명 고아의 어머니, 한국에서 잠들다

 

남편이 공생원을 떠나 돌아오지 않은 지 십여 년이 흘렀어요.

윤학자 여사는 어느덧 56세의 나이가 되었어요. 수백 명의 공생원 아이들은 여전히 그녀와 함께하고 있었고 그사이 그녀의 공로를 인정하여 정부에서는 문화훈장을 수여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젊은 시절부터 폐가 좋지 않았던 그녀에게 결국 큰 병이 찾아오고야 말았어요. 그녀는 결국 병상에 누워 병마와 싸워야 했고 얼마 가지 않아 그녀가 길러낸 3천여 명의 아이들을 두고 세상을 떠났어요.

우케보시가 먹고 싶어요.”

그녀가 병상에 누워 숨을 거두기 전 그녀는 일본의 매실장아찌인 우네보시가 먹고 싶다고 말했어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한국에 끝까지 남아 아이들을 지켰던 그녀였지만 마음속엔 어머니가 계시는 일본에 대한 그리움이 컸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들을 돌보겠다던 남편과의 약속을 끝까지 지켜낸 윤학자 여사는 평온한 얼굴로 마지막 눈을 감을 수 있었어요.

그녀가 세상을 떠나던 날, 목포시는 슬픔에 빠졌어요. 3만 명이 넘는 목포 시민이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여들었어요. 윤학자 여사는 그녀의 귀한 삶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의 추모를 받으며 남편 윤치호 원장 곁으로 떠났어요.

 

일제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전쟁을 겪으며 힘든 시기에 타국에서 고아들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윤학자 여사. 그녀는 부모 잃은 아이들에게 기꺼이 엄마가 되어주고 큰 시련 속에서도 자신보다는 아이들을 위해 살려고 노력했어요. 아이들을 향한 헌신적인 사랑은 공생원 아이들뿐만 아니라 목포 시민과 우리나라의 국민에게 큰 울림을 주었답니다.

 

 

 

 

====================

 

수상자 인터뷰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두 아이의 엄마이자 직장에서는 아동복지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사회복지사 구민아입니다.

 

 

수상소감 한마디를 부탁드립니다.

당선 전화를 받았을 때 사무실이었는데 너무 기쁜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새벽에 짬짬이 시간내어 나름 정성껏 쓴 글이지만 워낙 요즘 글 잘쓰시는 분들이 많아 수상 할거라고는 큰 기대를 안했었거든요. 우수상이라는 말을 듣고 너무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평소 고아나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이 있으셨나요?

아이를 낳고 키우기 시작하니 우리아이 뿐만아니라 주변의 다른 모든 아이들을 부모의 눈으로 바라 보게 되더라구요. 당연히 누려야 할 것들, 당연히 받아야 할 관심과 사랑이 어떤 아이들에게는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내가 받은 숙제가 내 아이만 잘 키우는 것만이 아니겠구나라고 느꼈어요.

업무를 하면서 어쩔수없이 부모의 손에 크지 못하고 시설이나 위탁을 보내야 하는 아동을 만난 경우엔 아직 세상을 모르는 아이들의 눈빛이 너무도 깨끗해 그 눈을 보고 마음속으로 많이 울기도 했습니다.

 

 

전부터 윤학자 여사에 관해 알고 계셨나요? 혹은 윤학자 여사에 대한 본인의 생각이나 느낌은 어떤가요?

윤학자 여사는 이번 공모전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타국에서 한평생을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신 그 일생을 되짚어보면서 최대한 아이들을 사랑했던 그분의 마음을 동화에 담고자 노력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단 한사람에게라도 의미있는 존재가 되었다면 그걸로도 충분히 잘 살았다고 생각이드는데 윤학자 여사는 그 수많은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어주고 빛이 되어주며 큰 사랑을 남기고 가신 것 같습니다.

 

이번 공모전을 통해 윤학자 여사의 의미있는 삶을 알 수 있게 되어 저에게는 그것이 수상보다도 더 큰 영광이었습니다. 아직도 학대, 방임, 가난 등으로 부모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지못하는 아이들이 많은데 그런 아동들을 항상 눈에 담으며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좋은 공모전으로 내 주변의 아이들을 한번더 둘러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