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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고아의날

 노리타니 씨와 만난 다음 날은 무척 바빴다.

 

 어머니는 일찍 일어나셨다.

 

 어느 틈에 머리를 손질하셨는지 치마저고리 차림의 어머니가 아름답게 보였다.

 

 아무리 뜯어봐도 사회사업가로는 보이지 않는다.

 

 평범한 결혼을 하셨더라면 분명히 행복한 가정의 현모양처가 되셨을 텐데 하며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자니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암이란 무서운 병마를 안고 일본까지 와서 텔레비전 출연이며 생면 부지의 사람과 만나고 있는 어머니.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우리는 도쿄의 중심부 정부 청사가 늘어서 있는 카스미가세키(霞ヶ関)에 도착했다.

 

 토라노몬(虎ノ門)에서 문부성(文部省)과 대장성(大藏省)을 따라 비탈을 올라가자 쿠보회관(久保會館)이 나오고, 그 안쪽으로 일본 사회사업 회관이 있었다.

 

 일본 사회사업 회관에는 사회복지 협의회며 노인 단체, 복지 신문사 등의 사무실이 있었다.

 

 중앙 공동 모금회는 5층이었다.

 

 나는 학교에서 지역사회 개발학을 수강했지만, 아직 한국에는 모금 전문 단체가 없었다.

 

 대규모 수해나 화재 등의 재해가 발생할 시 긴급복구 재해대책 위원회가 설치될 뿐이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이끌려 그 공동 모금회를 방문했다.

 

 이 안에는 다우치 후원회 연락 사무소도 있었다.

 

 공동 모금회에서는 20여 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었다.

 

 모두 어머니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키가 크고 서양인같이 멋진 코를 가진 신사가 의자에서 일어나며 어머니를 맞았다.

 

 두 사람이 정중하게 인사를 나눈 후 그 신사는 문득 내 존재를 의식한 듯 어머니에게 물었다.

 

 “졸원생(卒園生)입니까?”

 

 당시 빼빼 말라 있던 나와 둥그스름한 얼굴의 어머니와는 조금도 닮지 않았다.

 

 모자지간으로 보이지 않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머니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장남이에요. 중앙신학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습니다.”

 

 “실례했군요.”

 

 크게 실언이라도 했다는 듯 장신의 신사 오노(小野) 씨는 한 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오노 씨의 책상 뒤편 벽에는 다우치의 연락처와 쉽게 눈에 띄도록 전화번호를 적어둔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오노 씨는 조그만 일도 그냥 지나치지 않은 성격 같았다.

 

 예술가 특유의 섬세함도 느껴졌다.

 

 이것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오노 씨는 연주자로서도 널리 알려진 분이었다.

 

 어머니는 열심히 이야기했다.

 

 그는 간간이 메모하고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이 무엇을 의논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었고 이야기의 진행 상태도 몰랐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나도 이번 방일 목적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표정과 분위기로 대강 짐작은 가능했다.

 

 그렇지만 이야기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피로감이 번지고 있었다.

 

 이야기가 잘 풀리지 않는 것 같았다.

 

 오노 씨의 표정도 밝지 않았다. 피곤한 모습이 역력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이미 세 시간째 계속되고 있었다.

 

 일본말을 한마디도 못 하는 나로서는 상상 이상의 고통이었다.

 

 예의 바르게 등을 꼿꼿이 세우고 앉아 있으려니 발이 저리고 머리도 욱신거렸다.

 

 내용도 모르는 대화를 짐짓 알아들은 체. 거기다 끊임없이 미소를 머금으며 귀 기울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멍청이 짓이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오려 했다.

 

 눈을 질끈 감으며 가까스로 웃음을 억눌렀다.

 

 어머니가 사무실을 나온 것은 오후 4시가 지나서였다.

 

 어쨌든 밖으로 나온 것이 기뻤다. 햇살이 무척 좋았다. 상쾌한 기분이었다.

 

 꼼짝 못 하고 사무실에 앉아 있는 것보다도 걷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표정은 흐렸다. 조금 전과 다름없었다.

 

 입을 굳게 다문 어머니. 오노 씨와의 이야기가 어머니의 기대에 벗어난 것이 분명했다.

 

 1965년에 어머니는 폐암 수술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방문이 불가능했다.

 

 그 한 해 전에 발족한 다우치 후원회의 이후 동향과 운영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의논하고 궤도에 올리는 일이 이번 어머니의 주요한 방일 목적의 하나였다.

 

 오노 씨와의 대담으로 후원회의 방침과 움직임이 파악되었다.

 

 원아 1명당 매월 500엔, 1년에 6천 엔의 교육비를 모금하기로 했다고 한다.

 

 크게 실망했다.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지금 공생원의 운영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심각한 상태입니다. 일본에서 경제계가 중심이 되어 후원 단체가 생겼다 하여 6·25 이래 지금까지 원조하던 기독교 세계 봉사회의 식량 원조가 중단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점심으로 죽도 변변히 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 치즈코로서는 할 수 없는 말이었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어디론가 걸어가셨다.

 

 나는 어머니의 안색을 살피면서,

 

 “이 도쿄 넓은 천지에 어머니 도와줄 곳이 이곳 한 곳뿐이겠어요? 보세요. 어제 만났던 노리타니 씨처럼 도와주는 사람도 있잖아요.”

 라며 힘을 내라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묵묵히 걷기만 했다.

 

 나는 어머니가 어딜 가고자 하는지 짐작되지 않았다.

 

 큰길로 나오자 어머니는 지나가는 택시를 크게 손짓하여 불렀다.

 

 택시는 곧 우리 앞에 섰다.

 

 “사루가쿠쵸(猿楽町)에 있는 한국 YMCA….”

 

 ‘거기에는 또 어떤 분이 있을까? 한국 YMCA라면 한국말이 통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한참 침묵을 지키던 어머니는 옆에 앉아 있는 내게 말을 건넸다.

 

 “기(基)야, 일본에서는 큰소리를 치지 않는단다. 택시를 잡을 때도 조용히 손만 들면 돼. 그리고 택시가 아니고 타쿠시야.”

 

 나는 몇 번이고 “타쿠시, 타쿠시” 하고 연습해 보았지만 타쿠시를 부를 때면 나도 모르게 “택시”라고 소리치게 된다.

 

 한국 YMCA는 아주 옛날 건물이었다.

 

 계단을 오르니 우측에 ‘일한 친화회’라고 나무에다 먹으로 쓴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쉰 살가량 돼 보이는 키가 큰 여자분이 나와 맞아주었다.

 

 또 한국말이 통하지 않는구나. 이번에는 얼마나 오래 걸릴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 부인은 내가 아들인 것을 알고 “안녕하세요?” 하고 한국말로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다음 말은 못 한다고 했다.

 

 한국과 일본 양국의 친화를 위해 스즈키 하지메(鈴木一)란 분이 만들었다는 이 단체는 문화인들과의 교류가 많았으나, 그 단체 역시 돈을 해결해 줄 만한 곳은 못 되었다.

 

 다만 카마타(鎌田) 씨라는 그 여자분은 남편이 일찍 전사하고 휴전 당시 북한에서 월남하느라고 갖은 고생을 하신 분이라서 어머니 치즈코의 운명을 동정해 주는 말벗이 되었다.

 

 어머니는 실의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그분을 찾아갔는지도 모른다.

 

 카마타 씨는 이야기가 한차례 끝나자,

 

 “오늘은 모처럼 아드님하고 같이 오셨으니 맛있는 일본 요리라도 먹읍시다.”

 

 라며 핸드백을 들고 나섰다. 나도 따라 나셨다.

 

 사루가쿠쵸에서 150m쯤 걸었을까. 덴뿌라를 맛있게 한다는 ‘천수암(天壽庵)이라는 음식점이 있었다.

 

 카마타 씨는 텐동(天井)을 시켜 주었다. 맛있었다.

 

 그런데 빨리 먹으면 더 맛있을 것 같은데 빨리 먹을 수가 없었다.

 

 소리가 나기 때문이다.

 

 어머니로부터 단단히 주의를 받은 터였다.

 

 소리를 내지 않고 먹으려니 더 큰소리가 나는 것 같아 불안했다.

 

 평소 식사 습관대로 해치우면 편할 텐데….

 

 두 사람은 뭔가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어머니는 주로 듣는 쪽이었다.

 

 식사를 끝낸 우리는 스이도바시(水道橋) 역 쪽으로 걸었다.

 

 카마타 씨는 역 구내의 매점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더니 지갑을 꺼냈다.

 

 ‘차표를 사려나?’ 하고 생각했다. 카마타 씨는 웬 카드 같은 종이 석 장을 사더니 어머니와 내게 건네주었다.

 

 복권이었다. 당첨되면 5백만 엔의 상금이 나온다는 것이다.

 

 “가난한 저로서는 이 정도밖에 사주지 못합니다”라고 이야기하는 듯했다.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어머니께 복권을 다 사주었을까?

 

 “어머니, 당첨되면 좋겠어요.”

 

 어머니의 사기를 북돋우고 싶어 입을 열었다.

 

 “세금은 얼마나 떼지요?”

 

 “글쎄….”

 

 카마타 씨가 대답했다.

 

 “복지 사업에는 세금이 면제될 거예요.”

 

 나는 눈이 동그래지며 감탄했다.

 

 어머니도 카마타 씨도 덩달아 웃었다.

 

 도쿄에 온 지도 보름이 지났다.

 

 그동안에 중앙 공동 모금회의 오노 상과 일본 클럽의 하나와 사부로 씨 등의 안내로 관방장관 하시모토(橋本 美三郞) 씨를 비롯하여 중의원의원 나다오 코오키치(灘尾弘吉), 노다 유이치(野田卯一), 다나카 타츠오(田中龍夫), 하라다 겐(原田憲) 등 일본의 유력 인사들을 순방했다.

 

 그때마다 나는 어머니에게 실망했다.

 

 어디를 가도 “오카게사마데(덕분에 잘 지냅니다)”였다. 지금 공생원은 무엇이 어렵고 무엇이 가장 필요하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날도 오노 씨와 우리는 경제 단체 연합회로 우에무라 씨를 만나러 갔다.

 

 비서인 듯한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우에야마(植山) 씨가 먼저 대기실로 안내했다.

 

 정중한 말씨로 우에무라 회장은 지금 소련에서 온 손님과 접견 중이라고 설명했다.

 

 과연 일본 경제계의 총리다운 분위기구나 생각했다.

 

 바쁘게 드나드는 그는 드나들 때마다 특히 나를 쳐다보는 눈초리가 보통이 아니었다.

 

 비서를 오래 하다 보면 사람을 식별하게 되는가 보다 하고 기다리는 동안 멋대로 이런저런 상상을 하고 있었다.

 

 한참 뒤 우리 세 사람은 회장실로 안내되었다.

 

 칠순이 훨씬 넘어 뵈는 우에무라 씨는 문까지 나와 맞아주었다.

 

 둥근 테이블에 앉은 나는 먼저 인사를 드렸다.

 

 “건강이 좋아지셨군요. 걱정했습니다.”

 

 우에무라 회장이 부드럽게 화제를 꺼냈다.

 

 그에게는 재계 총리 같은 위업은 없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 같은 인상이었다.

 

 화제가 공생원의 원아들에게 미치자 마치 동심으로 돌아간 듯 만면에 미소를 띠며 홋카이도(北海道)에서 자랐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했다.

 

 어머니는 인간 우에무라, 아니 인자한 할아버지 앞에서 조용하고 차분히 듣고만 계셨다.

 

 ‘시간이 없는데, 빨리 용건을 마치지 않으면 다음 손님이 기다릴 텐데….’

 

 어머니 치즈코의 입에서 무엇이고 한마디쯤 나올 줄 알았으나 시종 침묵만 지키고 계셨다.

 

 덕분에 사업이 순조롭다는 태도였다.

 

 나는 순간 화가 치밀었다.

 

 일본에 한가하게 인사만 하러 온 게 아니지 않은가?

 

 목포에서는 직원 모두 어머니의 귀국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텐데….

 

 구체적으로 무엇이 필요하다고 한마디쯤 하면 좋지 않은가?

 

 그러나 그 상황에서 화를 낼 수는 없었다.

 

 회장실을 나올 때 우에무라 씨는 문밖까지 나와서 어머니, 나, 오노 씨에게 일일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경제 단체 연합회 건물을 나와 오노 씨와 헤어지자 나는 더 참지 못해 입을 열었다.

 

 “어째서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셨어요?”

 

 어머니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분은 우리가 고생하고 있는 줄 안다. 도와줄 생각이 있으면 말하지 않아도 도와준단다.”

 

 “아이고 답답해라. 어머니, 우에무라 씨가 회장이 되었다고 일 년 열두 달 공생원만 생각하고 있을 줄 알아요? 세계를 상대하고 전국적으로 활약하는 그분은 어머니를 만나고 있는 그 시간만 어머니와 공생원 일을 기억하지 그 외 시간에는 후원회 회장이 아니란 말씀이에요.”

 

 나는 어머니에게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폭발시켰다.

 

 “그래도 할 수 없다. 오노 씨도 있고 비서도 있잖니?”

 

 모든 것을 그분들의 뜻에 맡긴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어머니, 당신은 어머니입니다. 그저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나 하는 한 지아비의 아녀잡니다.’

 

 그 어머니가 격에 맞지 않는 십자가를 지고 고생하고 있는 것이 내 눈에는 안타깝게만 보였다.

 

 이리하여 도쿄에서의 일차 인사가 모두 끝난 셈이었다.

 

 우리들의 한 달간의 활동은 문자 그대로 인사치레로 끝난 것이다.

 

* * *

 

 도쿄에서의 일차 인사가 끝나자 우리는 오사카(大阪)로 발을 돌렸다.

 

 언젠가 공생원 아이들을 위해 공업용 재봉틀을 기증해 준 적이 있는 야마모토(山本) 씨의 자택에 묵었다.

 

 야마모토 씨는 한국인 촌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교포가 많이 사는 이쿠노구(生野區)에서 작은 플라스틱 공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40평 정도의 건물 1층이 공장이고 2층은 자택이었다.

 

 박애사(博愛社)를 방문하는 날이었다.

 

 오사카의 히가시 요도가와(東徒川)를 건너자 쥬우소오(十三)라고 하는 번화가가 나왔다.

 

 역 앞에서 칸자키바시(神崎橋)행 버스를 타고 두 번째 정류장에서 내리자 곧 낡은 교회당 꼭대기에 우뚝 솟아 있는 십자가가 우리들의 눈에 들어왔다.

 

 한국에는 교회가 많아서 기차로 여행하다 보면 창밖으로 십자가가 곳곳에 세워져 있는 풍경을 목격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에서 십자가를 발견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메이지(明治) 23년, 기독교인 코바시 카츠노스케(小橋勝之助)가 설립한 이래 갖은 시련을 견디며 발전해 온 박애사는 작년 1965년으로 창립 75주년을 맞이했다.

 

 5,560평의 넓은 대지 위에 세련된 현대풍의 5층 콘크리트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유아 홈도 근사했다.

 

 어머니와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황홀한 지경이었다.

 

 “기(基)야, 공생원은 언제쯤 이런 훌륭한 건물을 지을 수 있을까?”

 

 어머니는 부러운 눈으로 말씀하셨다.

 

 “어머니 공생원도 창립 70주년쯤이면 이만한 시설로 성장해 있을 거예요. 그전에 아버지가 돌아오신다면 더 빨리 지을 수 있을 거고요.”

 

 물론 어머니에게는 꿈같은 얘기였다.

 

 “아버지가 돌아오신다면 별문제지만… 요원한 일이지.”

 

 나는 아버지가 반드시 돌아오실 거라고 어머니에게 강조했다.

 

 만약 돌아오시지 않는다면 내가 이 박애사처럼 70주년이 될 때까지 완성하고 말겠다고 약속했다.

 

 어머니는 기뻐하며 행복한 얼굴을 지었다.

 

 우리는 박애사의 나카가와(中川) 이사장을 만났다.

 

 예순이 넘으신 온화한 성품의 이사장은 자신이 박애사에 관계하게 된 자초지종을 들려주시고 시설을 안내해 주셨다.

 

 운영 면의 경험담도 구체적으로 들려주셨다.

 

 나카가와 이사장의 이야기 속에는 적절한 충고도 많아서 나는 이것이 미래의 공생원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자신이 추구하던 것을 현실로 만난 기쁨에 가슴 설레며 숙소로 돌아왔다.

 

 “어서 오십시오.”

 

 야마모토 씨가 일손을 멈추고 맞아주었다.

 

 “오늘은 좀 성과가 있으셨습니까? 기부라도 받으셨는지요?”

 

 어머니가 조용히 대답하셨다.

 

 “박애사에 다녀왔습니다.”

 

 “박애사라뇨. 무슨 회사인데요?”

 

 “회사가 아니고요. 공생원 같은 고아원이랍니다.”

 

 “그런 덴 뭣하러 가셨습니까? 돈 들어올 일도 없을 텐데….”

 

 야마모토 씨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아무리 돈 있는 사람이라도 ‘자, 이 돈 쓰십시오.’ 할 사람 있겠어요?”

 

 어머니는 그저 미소로 대응하셨다.

 

 야마모토 씨는 우리가 안타까워 견딜 수 없다는 태도였다.

 

 우리가 서서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독일제 압축기는 쉼 없이 제품을 찍어대고 있었다.

 

 숨돌릴 새도 없이 제품이 쏟아져나와 포장이 미처 따라가지 못했다.

 

 포장에는 일손이 필요했지만, 일꾼이 부족해 매일 야간작업이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이 정도 일이라면 공생원 아이들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텐데.’

 

 이곳에서는 일손이 부족하여 애를 먹고 있는 판에 공생원에서는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 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태반이다.

 

 내게는 가슴 저리는 일이었다.

 

 찌는 듯한 더위가 계속되었다.

 

 잠을 칭해도 잠이 오지 않는다.

 

 아래층에서는 계속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나고 바람 한 점 없이 무덥기만 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여기가 공생원이라면 우물에라도 가서 시원한 물 한 바가지 퍼서 머리부터 끼얹으련만 남의 집 신세를 지는 처지에 그럴 수도 없고….

 

 밖에 나가보자, 조금은 낫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옷을 주워입고 계단을 내려갔다.

 

 “어디 가느냐?”

 

 공장 한구석에서 어머니 목소리가 났다.

 

 나는 깜짝 놀라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어머니가 직공들과 같이 작업을 하고 계시지 않은가!

 

 나는 나도 모르게 힐책하는 말투로 고함을 쳤다.

 

 “어머니! 여태 안 주무시고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글쎄 들어가 주무시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려도 말을 안 들으세요.”

 

 야마모토 씨 부인이 겸연쩍은 듯 말했다.

 

 “공장 일이 이렇게 많은데 잠을 잘 수 있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도와줘야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도와줘야지’하는 어머니의 말이 나를 움찔하게 했다.

 

 “어머니도 참, 저도 부르시지 않고….”

 

 “너는 잠을 못 자면 다음 날 아무것도 못 하잖니?”

 

 “어머니는요?”

 

 “나는 괜찮다”

 

 “하지만 어머니 몸도 생각하셔야죠.”

 

 그리고 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어머니, 어머니는 300명의 어머니란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