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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고아의날

 1967년 5월 13일 오사카 박애사와 목포 공생원의 자매결연식에 참석하기 위해 어머니는 병든 몸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오사카에서 결연식에 참석한 뒤 도쿄에 간 어머니는 몸에 심한 이상을 느꼈다.

 

 조금만 움직여도 열이 났다. 혈압도 정상이 아닌 듯했다.

 

 병이 도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어디 아는 병원도 없었다.

 

 도쿄에 병원이 한두 군데가 아닐 테지만 어머니가 갈 만한 병원은 없었다.

 

 어머니는 옛날부터 알고 지내던 무라카미(村上) 씨가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는 도쿄 후생 병원을 찾아가기로 했다.

 

 무라카미 씨는 반갑게 어머니를 맞아주었다.

 

 무라카미 씨는 마치 자기 일처럼 걱정하며 즉석에서 원장에게 상의하여 지시를 받았다.

 

 곧 진찰 준비에 들어가 혈액 검사, 소변 검사, X-ray 검사가 실시되었다.

 

 당장에 정밀한 결과는 알 수 없지만 잠시 휴양하는 게 좋겠다는 권유를 받았다.

 

 영양 상태, 혈액 순환, 호흡 기능 등 기초 기능이 모두 정상이 아니라는 진단이었다.

 

 특히 폐 기능이 극히 약해져 위장 장애 증세마저 보인다고 했다.

 

 “모처럼의 모국 방문이시라 하실 일도 많겠지만 이런 몸으로는 무리입니다. 아쉬운 대로 우리 병원에서 입원 책임을 질 데니 정밀 검사를 받으시는 게 어떻습니까?”

 

 무라카미 씨는 바로 입원을 하도록 종용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무라카미 씨의 호의를 받아 입원할 수는 없었다.

 

 “호의는 감사합니다. 하지만 일이 있어 입원은 한국에 돌아가서 하고 싶군요. 그때까지 움직일 수 있도록 두통약이나 지어주세요.”

 

 어머니는 무라카미 씨와 주치의의 권유를 물리쳤다.

 

 어머니가 병원에서 도망치듯 나온 것은 물론 일을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입원하고 싶어 하셨다.

 

 어머니가 쓰러졌다는 전보를 받은 나는 부랴부랴 도쿄로 향했다.

 

 하네다 공항에서 노리타니 씨의 차를 타고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달렸다.

 

 어머니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다. 나를 본 순간

 

 “빨리 왔구나.”

 

 하며 나의 두 손을 꼭 쥐셨다.

 

 “기야, 의사 선생님이 아무리 입원을 권해도 절대로 한국에서 하겠다고 해야 한다.”

 

 다짐하듯 거듭 말한 후 입을 다무셨다. 나는 어머니의 참뜻을 알 수가 없었다.

 

 “어머니 일본은 한국보다 의료 기술이 발달해 있어요. 여기서 치료하면 곧 나으실 거예요. 입원하세요.”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정말 바보다.

 

 평생 고생만 하시고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당신 몸은 전혀 생각 안 하셨다.

 

 어머니는 내 기분 따윈 전혀 알려고도 안 하셨다.

 

 “기야, 일본에서 입원할 돈이 있으면 원아들의 고등학교 진학비에 써야 한다.”

 

 어머니의 말에 나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리고 어머니의 얼굴만 쳐다봤다.

 

 ‘이분은 생을 포기한 걸까? 당신의 일은 조금도 생각지 않으시는구나. 태어난 순간부터 이런 운명을 타고난 것일까?’

 

 자신의 치료비를 절약해서 학비에 사용하라는 어머니의 본능적인 사랑 앞에 머리가 숙여졌다.

 

 그렇게도 훌륭한 어머니께 바보라고 대들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결국, 어머니 뜻대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일이 산더미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염원하던 한·일 국교 정상화가 체결된 이래 한국을 방문하는 재일 교포와 일본인이 급격히 늘어났다.

 

 목포를 찾은 사람들은 열이면 열 공생원을 방문했으므로 어머니는 손님 접대에 손 놓을 겨를이 없었다.

 

 어머니는 두통약을 하루 3회씩이나 복용하셨다.

 

 특히 글씨를 쓸 때면 깨알 같은 문자에 시신경을 집중시켜야 하므로 복용량도 많아졌다.

 

 하지만 편지나 문서는 보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남의 눈을 피해 가며 약을 복용했다.

 

 그날은 약을 과용한 탓인지 아니면 아이들이 바다에서 잡아다 준 소라가 상했던지 갑자기 어머니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누이가 급히 어머니를 박내과로 모시고 갔다.

 

 9월의 일이었다.

 

 얼굴에서는 줄곧 식은땀이 흐르고 의식이 가물가물한 상태였다.

 

 곁에서 애를 태우며 진찰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교통사고 환자가 실려 왔다.

 

 우리는 애가 달았다. 순서가 밀려날지 몰랐다.

 

 그러나 주치의인 박동철 박사는 어머니 쪽이 더 중태라고 판단하고 진찰을 서둘렀다.

 

 어머니가 뭔가 웅얼거렸다. 들릴까 말까 한 작은 목소리로

 

 “지금 들어온 환자부터 봐주세…”

 

 하며 손가락질하는 게 아닌가!

 

 자신보다는 저 환자 쪽을 봐달라는 뜻이었다.

 

 박 박사가 그 환지를 치료하고 어머니의 병실로 돌아왔을 때 이미 어머니는 의식 불명이었다.

 

* * *

 

 박 박사의 적절한 조치로 어머니는 다시 회복되신 듯했다.

 

 병원에서 퇴원한 어머니는 조금씩 거동하며 간단한 원내 업무를 시작하는 정도였다.

 

 이 정도면 안심해도 좋겠다고 판단한 나는 일본으로 떠났다.

 

 강 교수의 권유로 도쿄에서 열리는 아시아 서태평양 지구 사회사업가 대회에 한국 대표의 한 사람으로 출석하는 일과 일찍부터 고심해 온 일본 유학을 구체적으로 결정하려는 주된 목적에서였다.

 

 일본을 방문한 나는 사회사업가 대회에서 도시샤(同志社) 대학의 시마다 케이이치로(嶋田啓一郞) 교수를 알게 됐다.

 

 공부를 계속할 의사가 있다면 우리 학교로 와도 좋다는 승낙도 얻었다.

 

 유학에의 꿈은 더욱 굳어져 갔다.

 

 동지사 대학과 오사카 시립대학 대학원, 두 개 학교가 후보에 올라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나는 어머니가 걱정스러웠지만, 유학이 실현된다는 기쁨에 마음을 뺏기고 있었다.

 

 오사카에서 도쿄로 돌아온 나는 공동 모금회의 오노 씨를 만나러 갔다.

 

 오노 씨는 언제나처럼 침착하게 나에게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발신인은 강만춘 교수였다.

 

 나는 오노 씨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서울에서 내 앞으로 보내온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내용은 학회나 협의회의 이야기가 아니고 어머니가 지금 서울 성모병원 정신과 504호실에 입원했다는 것과 학교 진학 추진은 보류하고 일단 급히 귀국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외지에 있는 나에게 되도록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적고 있었다.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목포에 계신 어머니가 언제, 왜 서울까지 가셔서 입원했다는 것인가?

 

 폐암이 재발하신 걸까?

 

 입원실은 왜 정신과로 되어 있을까?

 

 의문스러운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무튼, 어머니에게 이상이 생긴 것이 분명하고 몹시 위급한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서둘러 귀국했다.

 

 김포 공항에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미처 연락할 틈도 없었기 때문이다.

 

 택시를 잡아타고 성모병원으로 달렸다.

 

 병실을 들어서자 엷은 하늘색 가운을 걸친 어머니가 수척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나는 순간 쏟아지는 눈물을 참으며 어머니 곁으로 달려갔다.

 

 ‘살아 계시니 감사합니다.’

 

 그 생각만이 떠올랐다.

 

 “네가 돌아왔으니 이젠 살았다.”

 

 라는 한마디를 토하시고는 스르르 눈을 감으시지 않는가?

 

 여태까지 한 번도 자식을 향해서 의지하지 않았던 어머니, 그리고 고아들 틈에 섞어놓고, 자식이라 해서 특별히 사랑을 쏟지도, 의식하지도 않던 어머닌데, 지금 나를 향해 ‘인제 살았다’라고 하시다니….

 

 이 말은 얼마나 나를 기다렸다는 뜻인가?

 

 이 한마디에는 나를 향한 어머니의 애정과 기대가 모두 들어 있었다.

 

 어머니 곁에 있어 드리자.

 

 유학 따윈 그 순간 내게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병실에는 강 교수와 대학 동창들, 누나와 매형, 친척들이 침통한 표정으로 있었다.

 

 “어머니 안심하세요. 제가 꼭 옆에 있을 테니까요.”

 

 어머니는 내 말에 안심이 됐는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셨다.

 

 나는 그 길로 담당 주치의를 만나보았다.

 

 노 박사는 암이 재발한 것 같다고 일러주었다.

 

 한 줄기 가느다란 희망이 사라졌다.

 

 이제 남은 건 얼마나 더 사시느냐는 것, 그리고 어떻게 목숨을 유지하느냐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어머니가 알면 어떻게 될까?

 

 어머니는 희망이 없는 자신의 육신을 병원에 의지하려고 할 것인가?

 

 도쿄에서도 입원비 걱정을 했는데 모든 것을 포기하고 퇴원하자고 하시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복잡한 심경으로 노 박사의 방을 나왔다.

 

 그러나 다행히도 어머니의 병세는 호전되었다.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필 무렵 어머니는 “코스모스가 참 예쁘구나”라고 말씀하실 정도였다.

 

 어느덧 10월도 지나고 성모병원에 입원한 지도 20일이나 되었다.

 

 어머니는 혼자서 병실의 복도를 걷기도 하고 화장실을 다녀올 수도 있게 되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규칙적으로 걷는 연습을 계속한 효과가 나타난 것일까?

 

 나는 줄곧 어머니 곁에서 시중을 들었다.

 

 “어머니, 건강이 아주 좋아지셨어요. 공생원에서는 매일같이 어머니를 위해 원아들이 기도하고 있대요.”

 

 나의 말에 어머니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괜히 공생원 이야기를 한 게 아닐까? 모처럼 사업을 잊고 계시는 것 같았는데…’

 

 순간 나는 나의 경솔함을 후회했다.

 

 어머니는 종이와 펜을 찾았다.

 

 갑자기 무슨 생각을 하신 걸까? 글을 쓰고 싶으신가?

 

 나는 조심스럽게 어머니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용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지웅(李志雄).

 

 ‘어머니 마음속에 그토록 남아 있는 사람인가? 서울에도 안 계시는데. 지금은 도쿄에 가 있는 사람을….’

 

 이지웅 씨는 도쿄 대학에서 신문학을 연구하고 있었다.

 

 편지 내용은 점차 회복되어간다는 안부와 도쿄 생활이 익숙해졌는지 여부, 그리고 언제나 공생원 일을 돌봐주셔서 감사하다는 것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이 편지는 평범한 것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끝부분을 읽은 나는 깜짝 놀랐다.

 

 “…이 국장님, 저의 어린 자식 4남매를 부탁합니다.”

 

 어머니가 낳은 4남매. 누나와 나 그리고 여동생, 남동생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병든 어머니는 머릿속으로 어린 4남매의 앞일을 걱정하고 계시다가 마침내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이지웅 씨에게 사후를 부탁하고자 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은사 다카오 선생과 후원회의 일을 맡은 오노 씨에게도 문안 편지를 썼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어머니, 오늘은 일찍 일어나셨네요. 어머니가 일어나신 것도 모르고 여태 잤으니….”

 

 아침 7시였다.

 

 간호한다는 내가 어머니보다 늦게 일어나서 하는 말이었다.

 

 어머니는 언제 일어났는지 내 양말을 빨아 창가에 널어 말리고 컨디션이 좋으신지 행복한 표정이셨다.

 

 “네 양말을 빨아 본 것도 오랜만이구나. 엄마를 많이 원망했을 줄 안다.”

 

 그리고는

 

 “이 어미는 너에게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는데 이 좁고 불편한 곳에서 자면서 나를 간호해 주다니…”

 

 하시며 계속 말을 이었다.

 

 “너는 아버지를 쏙 빼닮았다. 너를 보고 있으면 아버지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돼. 어미가 아주 고생스러울 때, ‘누구 날 도와줄 사람이 없을까?’ 하고 얼마나 생각했는지 모른다. 어린 너를 고무줄처럼 길게 늘일 순 없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단다.”

 

 항시 바쁘게만 보였던 어머니가 언제 그런 생각을 했었는지 나로선 뜻밖이었다.

 

 또한,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버지를 닮은 네가 사회사업학을 전공했으니 이 엄마보다 훌륭하게 공생원을 키울 줄 믿는다. 나나 아버지는 그저 불쌍한 아이들을 주워다 기른 자선 사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앞으로 너는 다를 줄 안다. 지금 나에게 소원이 있다면 직장도 없이 공생원을 떠나는 아이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일이다. 그리고 고아가 적은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계속하여 어머니는 말했다.

 

 “나는 사회사업 같은 큰일을 할 만한 그릇이 아니었다. 고아를 위해 고생하는 아버지 곁에서 그저 아버지를 돕겠다는 생각으로 결혼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연 행방불명되고 나는 그분이 오시는 날까지만이라는 생각 하나로 모든 고생을 참으며 일해 왔을 뿐이다. 내게는 사회사업을 할 능력도 적성도 없었다. 힘 있는 사회사업가들은 땅을 산다, 뭐를 한다 하며 재산을 모아야 고아 사업을 할 수 있다고 야단이었지. 뒤늦게 시작한 사람들도 모두가 기반이 튼튼해졌는데 공생원은 자립 대책도 못 세우고 이렇게 나는 누워만 있으니 이 엄마는 천상 3등 원장밖에 되지 못했구나.”

 

 어머니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말 없이 듣고 있었다. 무엇이 1등이고 무엇이 3등인가? 어머니야말로 하늘나라의 상까지 받으실 분이 아닌가!

 

 “성실하게 살아오신 어머니를 아버지도 칭찬하실 겁니다. 그리고 ‘고생만 시켜서 미안하오. 여보, 수고했소.’ 하실 거고요.”

 

 나는 어머니를 위로해 드리고 싶었다.

 

 “어머니, 아버지 오시는 것 보셔야죠. 의사 선생님도 어머니 건강이 좋아졌다며 놀라시던데요?”

 

 그러나 어머니는 고개를 흔드셨다.

 

 “내가 오래 살면 너희들 고생만 시키지….”

 

 그리고는 핸드백 속에 간직했던 수첩과 방명록을 꺼내셨다.

 

 “잘 보관해야 한다.”

 

 조그마한 수첩에는 일본 방문 때 만났던 인사들의 자택 주소와 전화번호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방명록에는 취지문과 함께 목포 공생원 다우치 치즈코(尹鶴子)라는 두 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뒷장에는 그 취지문을 들고 방문했던 일본을 움직이고 있는 정·재계 지도급 인사들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 * *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어머니의 건강은 좀 나아지는가 싶으면 다시 악화하기를 거듭했다.

 

 일단 나빠진 건강은 좀처럼 그 이전 상태까지 회복되지 않는 것이 특징이었다.

 

 어머니는 날로 쇠약해졌다.

 

 여름이 되면서부터 어머니의 건강은 한층 나빠졌다.

 

 “이 여름을 넘겨야 할 텐데…. 먹을 것을 전혀 입에 대지 못하시니 힘이 있을라구.”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어머니를 걱정하며 누나 청미가 말했다.

 

 그런데 믿음이 좋은 누나는 계속 병원에만 의지하고 있는 나의 태도에 큰 불만이었다.

 

 “고집부리지 말고 한 번만이라도 현신애 권사님께 모시고 가자.”

 

 그에게 안수를 받자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막내 고모도 매일 권하셨다.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그런 말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하도 권하는 바람에

 

 “현 권사라는 사람이 어디 계신데요?”

 

 하고 물어보았다.

 

 “이 병원 가까운 곳에 계신다. 을지로 4가 시장에서 특별 집회를 하고 있단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번 찾아 가보자.”

 

 누나는 열을 올리며 설명했다.

 

 “어제도 이 누나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눈먼 장님이 눈을 뜨더라.”

 

 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를 설득하지 못한 누나는 급기야 최 목사를 모시고 왔다.

 

 어머니를 모셔가려는 것이다.

 

 최 목사는 어머니의 병실에 들어오자마자 큰기침을 하시더니 어머니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도라기보다 절규 같은 것이었다. 큰소리로 곡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웠다.

 

 ‘기도란 인간과 하나님과의 대화가 아닌가? 그런데 꼭 큰소리를 내야 하나? 그리고 한 발자국도 걷지 못하는 어머니가 굳이 병실을 떠나 신령하다는 권사 앞에 가 어쩌자는 건가?

 

 “어머니의 병은 의학으로 고칠 수 없네.”

 

 못 미더워하고 있는 나를 향해 최 목사가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신령한 분의 안수를 받아야 하네.”

 

 “병원만 의지하다가 어머님이 돌아가시기라도 하는 날엔 그 책임은 자네에게 있네.”

 

 위협조였다.

 

 이번에는 누나가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모두 어머니를 위한 일이야. 기, 네가 어머니 아들이라면 나도 딸자식이다. 어머니의 자식이야. 내 말도 들어다오.”

 

 아무래도 석연치 않았다.

 

 하필이면 왜 그런 위험한 일을 하려 하나?

 

 “지금 어머니를 자리에서 옮기는 것은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리는 자살 행위와 같습니다. 누나도 보다시피 손에는 링거 주사기가, 코에는 산소 호흡기가 끼워져 있지 않습니까?”

 

 누나 말처럼 누나도 딸자식이면서 이런 상태의 어머니를 그 현 권사 앞으로 모시고 가려는 태도에 아연실색했다.

 

 저렇게 무조건 하나님께 매달리는 신앙이 어디에서 나올 수 있는지 부럽기까지 했다.

 

 “기야, 생각해 봐라 하나님 아버지께는 무조건 매달려야 한다. 너처럼 한쪽은 인간의 의술을 믿고 한쪽은 하나님의 권능을 기대해서는 어머니의 병을 고칠 수 없다.”

 

 누나도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누나가 아무리 눈물을 흘려도 하는 수 없었다.

 

 어머니의 병마는 어머니의 심신을 한 부분씩 점령하더니 마침내 시력에도 그 장애가 나타났다.

 

 몸 전체에 합병증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주위 사람들의 안수 권유는 더욱 강해졌다.

 

 최 목사나 누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신령의 세계에 매달리려 했다.

 

 어머니가 혹시 사망하면 그 책임은 자네에게 있다고 한 최 목사의 말이 귀청을 때렸다.

 

 어머니가 갑자기 나를 부르셨다.

 

 순간 나는 어머님의 손을 잡았다.

 

 “기야. 엄마는 네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구나.”

 

 “아무것도 못 드셨으니 힘이 없어 그러실 거예요. 이 죽을 드시고 나면 힘이 날 겁니다.”

 

 나는 누나가 마련해 온 멀건 쌀죽을 어머니 입에 떠넣어 드렸다.

 

 그때였다.

 

 어머니는 갑자기 일본말로

 

 “모토이(基), 모토이”

 

 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사용하시던 한국말에서 일본말로 변한 것이다.

 

 나는 귀를 의심하면서 어머니 곁으로 바싹 다가가 어머니 입 쪽으로 귀를 갖다 댔다.

 

 어머니는 들릴까 말까 한 음성으로,

 

 “우메보시가, 우메보시가 다베타이(매실장아찌가 먹고 싶다).”

 

 라고 했다.

 

수정됨_일러스트 부문_이혜숙_5-1.jpg

 

 어머니는 그 어린 시절 고치의 어머니 품으로 돌아가신 걸까?

 

 나는 너무나 큰 충격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좀 전까지도 한국말을 사용하셨던 어머니.

 

 흰 저고리에 검정 통치마를 입고 일본을 누비시던 어머니.

 

 TV 출연 때도 치마저고리로 한국인이 되었음을 알리시던 어머니.

 

 김치를 아주 맛있게 잡수시던 어머니.

 

 당신 자식을 한국인으로 30년이나 키워오신 어머니.

 

 그 어머니가 일본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우메보시가 먹고 싶다고 아들에게 호소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머니에게 사용하기 쉬운 말은 일본말이었던가?

 

 그리고 어머니는 일본의 우메보시를 김치보다 더 좋아하셨단 말인가?

 

 나는 어머니를 끌어안고

 

 “어머니, 어머니”

 

 하며 목놓아 울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병실 문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얼마쯤 달렸을까? 그곳은 일본 음식점으로 유명한 시청 옆 무교동의 이학(二鶴)이었다.

 

 나는 가마메시(솥밥)를 시킨 후 도시락에 싸달라고 부탁하고는 우메보시도 특별히 주문했다.

 

 점원 아이는

 

 “이게 뭐가 맛이 있다고”

 

 하면서 우메보시 다섯 개를 나무 도시락에 넣어주었다.

 

 그 후로 어머니는 끝까지 한국말을 하지 않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