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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고아의날

 도쿄에서 돌아온 동양 통신사의 이지웅 국장이 문병을 왔다.

 

 “경향신문사에서 주최하는 ‘국민이 주는 희망의 상’ 대상자 모집에 서류를 제출해 보는 게 어때? 상금을 타면 어머니 치료비에 쓸 수 있어 좋지 않아?”

 

 하고 나에게 귀띔했다.

 

 나는 틈을 내어 경향신문사를 찾아갔다.

 

 그리고 ‘국민이 주는 희망의 상’에 대한 취지와 응모 요령을 알아서 병원으로 돌아왔다.

 

 신문사에서는 이름 없이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숨은 일꾼을 발굴하여 그 숨은 공로자를 격려하고 사회를 밝게 하는 데 취지가 있다고 했다.

 

 비로소 나는 이지웅 국장이 귀띔해 준 의미를 알 것 같았다.

 

 8절지를 사다가 병실에서 열심히 공생원의 역사를 사진으로 정리하고 그 사진 밑에 당시의 사실에 대한 설명문을 붙이는 작업을 했다.

 

 그리고 신문 기사를 첨부해 갔다. 내가 모르고 있던 어머니의 활동과 공생원의 역사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정성껏 작성한 한 장 한 장을 읽어나가면서 수없이 울었다.

 

 ‘그토록 수많은 고통과 역사의 흐름 속에서 굽히지 않고 오로지 한 길을 걸어온 장한 어머니가 지금 옆에 누워 계신다. 누가 이 어머니를 다시 일으킬 수 있을까? 누나 말대로 현 권사 앞으로 가야만 하는가?’

 

 어머니는 의식을 잃은 채 숨만 크게 그리고 작게 몰아쉬고 있었다.

 

 그러던 가을 10월 14일이었다.

 

 목포에서는 창립 40주년 기념행사에 귀빈을 맞이할 준비도 못 한 채 아이들만을 위한 잔치를 치를 준비만 하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

 

 그런데 어머니는 심한 호흡 곤란을 가져오면서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3층에 마련된 응급실로 옮겨졌다.

 

 급히 목포에 있는 누나며 매형이며 고모들에게도 연락했다.

 

 응급실에 들어간 어머니의 병세는 차도를 보이지 않고 이틀이나 혼수상태가 계속되었다.

 

 나와 누나 그리고 여동생과 남동생은 응급실 문밖에서 어머니의 회복을 기원했다.

 

 사흘째 되었을까? 조금 의식이 돌아온 것 같다는 간호사의 이야기였다.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긴장이 풀리는 탓인지 한꺼번에 피로가 몰려왔다.

 

 그 이튿날 그러니까 19일 나는 노 박사를 찾아갔다.

 

 어머니의 병세는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근 1년 가까이 곁에서 간호해 온 내가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차도가 없어서 고생이 많군.”

 

 하며 위로의 말을 건네는 노 박사에게 내가 말했다.

 

 “부탁이 있는데요, 어머니를 모시고 목포로 가야겠습니다.”

 

 “지금 상태로는 좀 곤란하지 않을까?”

 

 나는 이제까지의 어머니의 삶을 소상히 이야기하고 노 박사에게 간청했다.

 

 “어머니는 평생 고아들의 어머니였습니다. 돌아가신 모습으로 가서는 제가 그들에게 할 말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저의 어머니자 수많은 고아들의 어머니시니까요.”

 

 노 박사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좋다고 했다.

 

 그리고 간호사 한 사람을 동행시키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꼭 1년 1개월을 이 병원에서 밤을 새우며 지냈는데 생활의 일부가 되었던 이곳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친절했던 분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이렇게 하여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정확하게 1968년 10월 20일 21시 30분 야간 침대 열차 편으로 병원에서 배려해 준 간호사와 함께 목포로 향했다.

 

 목포역에 도착한 것은 새벽 5시 조금 지나서였다.

 

 어슴푸레 역 구내를 비추고 있는 전등 아래는 마중 나온 사람들이 토해내는 하얀 입김이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새벽인데도 많은 직원과 원아들이 나와 있었다.

 

 놀라운 것은 강수성 목포 시장과 김용진 교육 위원장도 나오신 것이다.

 

 어머니는 1967년 9월에 쓰러지신 지 꼭 1년 1개월 만에 원아들이 기다리는 공생원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공생원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이 시내에 퍼지자 서울까지 문병 오지 못했던 유지들이며 친지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어머니를 보고,

 

 “지금 목포에 오신지는 알고 계신가?”

 

 하고 물었다.

 

 “네, 알고 계십니다.”

 

 “자네가 수고가 많군. 어서 회복하셔야 할 텐데….”

 

 말이라도 고마웠다.

 

 그리고 그런 말을 듣고 있으니 왠지 어머니의 병이 회복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떤 분은 어머니의 미담을, 또 어떤 분은 그 옛날 결혼식 때의 에피소드를, 그리고 또 어떤 분은 어머니의 음식 솜씨를 들려주면서 죽음을 눈앞에 둔 한 인간의 생명을 안타까워했다.

 

 공생원의 원아들도 매일 어머니의 회복을 기도했다.

 

 개구쟁이 녀석들이 눈에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모습은 나의 가슴을 도려내었다.

 

 큰 아이들은 한 사람씩 차례로 들어와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어머니의 손을 꼭 쥐기도 했다.

 

 안타까운 순간들이 며칠이고 계속되었다.

 

 그러던 10월 말의 어느 날, 나는 급한 용무로 광주 도청에 나갔다.

 

 광주에 가면 불길한 생각이 드는 징크스가 있었다.

 

 아버지께서 행방불명 된 곳이 바로 광주이기 때문이다.

 

 도청의 일은 한번 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만나 볼 사람이 더 남아 있었다.

 

 나는 도청 앞의 충장로 길을 걸어서 여관을 찾았다.

 

 피곤한 몸으로 방에 벌렁 누워 천정을 무심코 보고 있었다.

 

 벽에 걸린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나는 전기에 감전된 듯 벌떡 일어났다.

 

 ‘오늘이 10월 30일. 그럼 내일은 어머니의 생신이 아닌가?’

 

 시계를 보니 밤 10시였다.

 

 “지금 출발하면 통금 시간까지는 목포에 갈 수 있다. 하지만 택시 운전사가 가려고 할지….”

 

 나는 여관을 박차고 나와 그 길로 목포로 달렸다.

 

 12시가 넘어서야 돌아온 나를 보고 고모는,

 

 “어머니의 발이 점점 차가워지는 걸 보니 내일을 넘기기가 힘들겠구나. 아이고, 네 애비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가야 할 텐데….”

 

 하고 말했다.

 

 눈물을 글썽이며 말하는 고모의 눈에는 문득 광주에서 소식이 끊긴 자신의 남동생, 치호의 얼굴이 어머니와 겹쳐 떠올랐다.

 

 “생일인데 음식은 못 먹더라도 자식이라도 옆에 있어야지. 아이고, 우짤까.”

 

 고모는 계속 눈물지었다.

 

 나는 어머니의 발과 온몸을 만져보았다.

 

 고모 말대로 다리에 냉기가 돌았다.

 

 말이 없는 향미만이 어머니 곁에서 떠나지 않고 간호를 했다.

 

 슬픔을 삼키려 애쓰는 작은 몸집의 누이가 대견스러웠다.

 

 “오늘은 생신이니 손님들도 많이 올 텐데, 지금 한숨 자는 게 좋을 게다.”

 

 나는 여동생에게 말하고는 어머니가 누워 계신 자리로 갔다.

 

 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무거운 숨만 내쉬고 있었다.

 

 날이 밝았다.

 

 맑게 갠 가을 하늘이 눈부셨다.

 

 다도해의 앞바다도 변함없이 잔잔한 물결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오늘은 어머니가 57세를 맞이하는 생신.

 

 일곱 살 때 고향 땅 고치에서 목포로 건너온 이래 50년.

 

 그 어머니는 지금 이국의 하늘 아래서 숨을 거두려 하는 것이다.

 

 아침부터 원내는 북적거렸다.

 

 다시는 맞지 못할 어머니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부엌에서는 음식 장만에 분주했고 보모 선생님들은 선물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우리 4남매도 선물 준비를 했다.

 

 그것은 마치 최후의 만찬과도 같았다.

 

 다만 주인공인 어머니만이 이 모든 바깥세상의 움직임을 알지 못하고 계속 깊은 잠만 주무시고 계셨다.

 

 오전 10시부터는 원아들과 직원 선생님들에 의한 축하 예배가 있었고, 11시에는 동부교회 그리고 오후 2시부터는 성산교회에서 50여 명의 교인들이 와서 차례로 기념 예배를 드렸다.

 

 1954년 이래 어머니 곁에서 어머니를 위해 기도해 오신 이귀동 목사 그리고 성산교회의 최대석 목사가 어머니 머리 위에 손을 얹고,

 

 “하나님 아버지, 지금 당신의 딸이 이렇게 고통 가운데 쉰일곱의 생일을 맞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가운데…”

 

 하며 기도하고 있을 때 어머니는 한마디 유언도 남기지 않은 채 파란 많은 생애에 종지부를 찍었다.

 

 가깝게 있던 향미가 갑자기 숨이 끊긴 어머니를 붙들고 울음을 터뜨리자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주여!” 하며 오열했다.

 

 그때가 14시 40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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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어머니의 운명 소식이 전해지자 수많은 시민들이 공생원으로 모여들었다.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은 김용진 교육 위원장이었다.

 

 급히 마련된 빈소에 절을 한 뒤 어머니의 사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고생 그만하시고 쉴 때도 되셨지. 정말 훌륭한 분이셨어.”

 

 하시곤 흐르는 눈물을 감출 길 없는지 손수건을 꺼내 연신 훔치셨다.

 

 “그 옛날 일본 사람의 관리 자식이 무엇이 부족해서 거지 대장이라고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던 아버지를 돕겠다고 나셨겠나? 정말 갸륵한 분이셨다.”

 

 하며 옛날을 회상하셨다.

 

 방에는 김정중, 조효석, 차남수 그리고 이복주 씨 등이 계속해서 들어왔다.

 

 그들은 모두 공생원의 산 증인이요, 은인들이었다.

 

 “윤치호, 그 사람 때문에 내가 죽을 고생을 안 했소?”

 

 하며 김용진 씨가 이야기를 꺼냈다.

 

 “아니, 이 양반이 목포 공설 시장에서 강연회를 하는데 청중 속에 끼어 있는 나를 보더니 ‘북교동에 사는 김용진 이놈아, 너는 춥고 가난한 백성들이 보이지 않느냐? 민중이 배를 꿇는 판에 너 혼자 대궐 같은 집에서 살면 다냐?’ 아, 이렇게 외치면서 연설을 하니 내가 어떻게 됐겠나? 그래서 나중에 ‘이 사람아, 이제 자네 연설할 때 내 이름은 들먹이지 말게’ 했더니 ‘아니, 형님도…. 대궐 같은 집에 사는 일본놈들아 하고 외치면 나를 잡아 가둘 테니까 시민들이 알아먹게 형님 이름을 댄 것입니다. 용서하십시오.’라고 하지 않겠나.”

 

 김용진 씨가 웃으면서 회상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조효석 씨가 거들었다.

 

 “그 사람 키는 작았지만 정말 대단했어.”

 

 화제가 아버지 쪽으로 흘러갔다.

 

 다들 아버지, 어머니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계속하여 시내에 사는 원 출신들이 몰려왔다.

 

 그들의 울음소리는 한 옥타브 높았고 나는 그들을 위로하느라 안간힘을 썼다.

 

 성산교회 교인들에 의해 어머니는 깨끗한 수의로 갈아 입혀졌다.

 

 그리고 곱게 화장도 하셨다.

 

 하늘나라에 가서 쓰실 면류관도 씌워드렸다.

 

 “아깝다 이렇게 수의를 입혀놓으니 새색시 같은데….”

 

 전 권사가 말했다.

 

 “이제 쉰일곱밖에 안 됐는데 고생하지 않고 살았으면 더 오래 사셨을걸….”

 

 원에서 원감으로 일하는 김정옥 씨가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조문객이 한차례 다녀간 후 나는 관 속에 누워 계신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2년 가까운 투병 생활에 지칠 대로 지쳐 통통하던 어머니의 얼굴은 반쪽이 되셨고 손을 잡으면 앙상한 뼈만 잡히는 어머니.

 

 마지막으로 보는 어머니의 얼굴은 너무도 평온했다. 여태까지 아무런 고통도 없었던 것처럼.

 

 다들 천사 같다고 하지 않는가? 다들 시집가는 처녀 같다고 하지 않는가?

 

 하늘나라에 가셔서 아버지 만날 준비를 하시느라 이토록 아름다우신가?

 

 나는 순간

 

 “어머니! 어머니가 유언하셨다면 뭐라고 하셨겠어요?”

 

 하고 아무 말도 없이 숨을 거둔 어머니를 향해 외쳤다.

 

 어머니의 얼굴은 그지없이 온화했다.

 

 모든 것을 용서하는 듯한, 불쌍한 고아들의 인자한 어머니의 얼굴 그것이었다.

 

 어머니의 얼굴은

 

 “기야, 아이들과 함께 아버지의 공생원을 잘 지켜다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시청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시청 총무과장입니다. 지금 자당님의 장례식을 시민장으로 모시기로 긴급 시 자문회의 결정이 났습니다. 마지막으로 유가족의 의사를 확인하라는 시장님의 분부십니다.”

 

 나는 이 갑작스러운 통보에 흥분을 가눌 수 없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수화기를 내렸다.

 

 어머니의 시민장 소식이 라디오 뉴스를 통해 보도되었다.

 

 이 뉴스를 듣고 전국에 흩어져 살던 어머니의 자랑스러운 자식들이 몰려들었다.

 

 택시 운전사로 일하던 재균 형도 왔다.

 

 나를 보자마자 왈칵 끌어안으며,

 

 “어머니가 돌아가시다니, 어떻게 된 일이야, 응?”

 

 하며 고개만 끄덕이는 내 앞에서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날 밤은 모두가 모여 운동장에 텐트를 치고 손님들을 맞아야 했다.

 

 모두가 목놓아 슬피 울어 유달산의 메아리가 그치지 않았다.

 

 11월 2일 오전 9시부터 공생원의 운동장에서는 어머니를 보내는 원아들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어머니의 시신은 20명의 원 출신들에 의해 운구되었다.

 

 어머니가 쓰시던 방 집무실 영아실 아동 숙사, 식당 강당 코스모스 피는 언덕 그리고 어머니가 늘 보시던 앞바다….

 

 모두에게 이별을 고하고 영구차에 실린 어머니는 원 출신 심형렬 군이 든 어머니의 사진을 선두로 공생원을 떠났다.

 

 나이 어린 꼬마들은 마지막 떠나는 어머니를 향해 유리창을 두드리며

 

 “어머니! 어머니!”

 

 하고 울부짖었다.

 

 서서히 행진하기 시작한 영구차는 어머니 치즈코가 졸업한 모교 목포 고등 여학교(현재 목포 여자 고등학교)에 들러 후배들의 꽃다발에 묻힌 채 이날 시민장이 열리는 목포역 광장으로 향했다.

 

 목포역 광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장렬이 도착하자 목포 상업 고등학교 밴드부의 장송 행진곡(葬送 行進曲)이 울려 퍼졌다.

 

 오전 11시. 식순에 따라 의식이 시작되었다.

 

 “지금으로부터고 윤학자 여사의 시민장을 엄수 하겠습니다.”

 

 라는 사회자의 엄숙한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울려 퍼졌다.

 

 맨 먼저 목포 시장님의 고별사가 있었다.

 

 사회사업가로서의 어머니의 공적을 칭송하고, 한 사람의 일본 여성으로서의 어머니를 소개했다.

 

 3천여 명의 고아들의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감사 그리고 죽음에 대한 애도를 두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려고도 하지 않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머니가 남긴 고아들의 뒤를 책임지고 돌봐주겠다고 약속했다.

 

 시장의 고별사가 끝나자 공생원생의 애도사가 시작되었다.

 

 어머니를 그리는 심정을 표현한 이재식 군의 목소리는 나의 가슴을 찢어놓았다.

 

 

 

  어머니!

 

  들국화 향기 드높은 파란 하늘 아래 오곡백과가 노래하는 이 가을에 어머니, 왜 먼 나라로 가셨습니까?

 

  눈물로 씨와 땀을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정 눈물과 피와 땀으로 씨를 뿌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머니, 바로 당신입니다.

 

  언어와 풍속이 다른 이 땅을 무엇 하러 찾아오셨습니까?

 

  40여 년의 일제 치하에서 배가 고파 울부짖는 고아들을 모아서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손수 밥을 얻어다가 먹여주셨습니다. 옷이 없어 떨고 있는 사람에게 옷을 지어주셨습니다.

 

  민족과 국경을 초월하셨던 사랑의 어머니!

 

  일찍이 이 땅에 기독교 정신에 뜻을 두고 불우한 고아들의 어머님이 되셨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고아들을 그 누가 도와주겠습니까?

 

  그러나 원장 어머니께서는 연약한 여자의 몸이면서도 굴하지 않고 강인하게 견디셨습니다.

 

  굽힐 줄 모르는 불사조처럼 우리들을 키우기에 여념이 없으셨습니다.

 

  민족의 비극인 6·25 사변으로 당신의 짐은 점점 무거워지셨습니다.

 

  그러나 짐이 무거워질수록 지칠 줄 모르시던 어머니, 그 어머니께서 한마디 말씀도 없으신 채 세상을 떠나다니, 이 어찌 된 일입니까?

 

  저희들의 코를 닦아주시던 인자하고 성스러운 어머니.

 

  왜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까? 네? 어머니! 저희 아들, 딸들이 불쌍하지도 않으십니까?

 

  오! 싸늘하게 변해 버린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그 순간 모든 만물은 고개를 숙여 외면했습니다.

 

  추운 겨울 얼었던 고사리손을 그 따뜻하신 어머님의 손으로 호호 녹여주시며 ’‘공부 잘하라이”하시던, 아직도 우리 말이 서툰 어머니.

 

  이제 어떻게 어머님의 따뜻한 손을 만질 수 있으며 어디서 또 그 누구에게서 그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까, 어머니.
 

  작년 10월 어머니께서 병상에 누우셨을 때 우리 아들, 딸들은 어머니의 쾌유를 빌었습니다.

 

  남아 있는 모든 식구들 어머니의 손에 자라난 식구들 또한 어머니의 사랑으로 먼저 사회에 나간 3천여 식구들 모두는 어머님만을 위해 두 손 모아 빌었습니다.

 

  그러나 일조일석으로 병환이 더해 가신다는 소식은 저희의 가슴을 어둠 속으로 몰고 갔습니다.

 

  일 년이나 가도록 어머니는 오시지 않고 우리들은 틈만 나면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그토록 위대하고 훌륭했다는 것을 느끼며 어머니께서 완쾌돼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을 믿으며 우리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어린 손들을 모아 하나님께 눈물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불쌍한 자의 눈물과 기도를 외면하시지 않는 하나님께서도 분명히 저희들과 같이 눈물을 흘리셨을 줄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어머니는 차디찬 시신이 되어 우리 곁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저희들에게 아무런 말씀도 남기시지 않은 채 돌아오셨습니다.

 

 

  어머니!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면 반드시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지요. 그 약속이 온 것입니까?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대자연의 법칙이라고는 하지만, 어머니! 당신은 정말 먼 나라로 가신 겁니까?

 

  어머니! 뭐라고 한 말씀 해주세요!

 

  우리들은 앞으로 어머님이 바라시는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것밖에는 약속할 것이 없군요.

 

  어머니 천국에서 부디 편히 쉬세요.

 


1968년 11월 2일
원아 대표 이재식

 

 

 

 심장을 멈추게 하는 듯한 이재식 군의 조사에 원아들은 물론 자리에 모인 모든 시민이 울었다.

 

 어머니를 실은 영구차가 목포역 광장에서 아버지의 고향인 함평군 나산면 옥동리로 향할 때 연도의 시민들은 발길을 멈추고 고개 숙여 명복을 빌었다.

 

 정말로 목포를 울린 시민장이었다.

 

 가난하기만 했던 거지 대장 부인의 장례에 3만 시민이 모였다.

 

 그날 11월 7일 ‘조선일보’는 사회면 머리기사로 “목포를 울린 장례식, 명복 빌어 첫 시민장”이라고 보도했다.

 

 어머니가 키운 전국에서 모여든 100여 명의 자식들에 의해 어머니는 마지막 여행길을 떠나신 것이다.